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사일런스(2016)
어떤 인간을 보았는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어떤 인간을 보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로드리게스, 페레이라, 가루프, 기치지로. 그 외에도 많은 인물이 극 안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종교에 묶여 설명되고 있지만 그들의 양상이, 특히나 로드리게스 신부가 보여준 모든 것들이 하나의 의미로 쉬이 정리되지 않는다.
사일런스. 한참을 생각하고서야 그 정돈되지 못한 이들의 공통점이 사일런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신을 향한 이들의 외침에도 여전하기만 한 침묵을 저마다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침묵 앞에 주저하게 되는 인간과 그럼에도 믿을 수밖에 없을 만큼 절망적인 삶을 사는 인간. 그 침묵 앞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타인을 지키기 위해 강인해진 인간과 계속해서 흔들리는 마음 때문에, 나를 지키기 위해, 타인의 아픔을 보기 어려워서 약해진 인간. 이 침묵에 대한 인간의 다양한 모습이 작품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인간관찰
인간을 설명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성선설이냐 성악설이냐로 접근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저런 토론 자리에 나가보면 꼭 한 번은 거치는 질문이다. 이는 우리가 교육, 예술과 같은 분야에서 자주 접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자신의 이익 문제를 놓고 경제학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감정의 관점에서 인간의 상태를 해석하려는 습관 때문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난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이 작품은 인간을 단순히 선과 악이란 일차원적 관점에서 논하지 않는다. 신의 사일런스 앞에서 선과 악을 넘나드는 인간의 모습을 관찰하고 보여준다. 정말 고차원적인 접근이 아닌가!
인간은 완전한 선도, 완전한 악도 아니다. 인간은 그 근본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정확히는 이를 확실히 할 수 없다. 다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저 인간들을,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상황을 그저 관찰한다. 그 상황에서 드러나거나 또는 숨어있는 특징을 찾아낸다. 세밀한 변화의 순간을 발견한다. 우린 인간을 어떤 절대적인 진리로써 규정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도 크고 작은 변화를 겪는 것이 인간이기에.
강한 것은 무엇이고 약한 것은 무엇인가
자기 생각을 굳건히 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이를 해낸 사람을 가리켜 ‘강한 사람’이라 얘기한다. 내 한 몸 잘 건사하고 나아가 타인까지 도울 수 있다면 또는 어떤 상황을 맞닥뜨려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이 또한 강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평생을 숨기고픈 사실이나 감정을 밖으로 끄집어내 용서를 구하는 행동은 용기 없이는 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죽음은, 그리고 자신의 집단에서 배척당하는 것은 누구나 두렵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여 타인을 살리려는 행동은 강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다.
강인함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나열하다 보면 이 영화에서 누군가 콕 집어 강한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려워진다. 로드리게스 신부와 페레이라 신부는 결국 배교한다. 그런데도 그들 내면엔 여전히 자신의 종교를 갈구하는 태도가 엿보인다. 형식은 저버렸어도 꺼지지 않는 그들의 믿음은 강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치지로는 (만약 그가 정말로 죄책감에 로드리게스 신부를 찾은 것이라면) 당사자에게 직접 용서를 구함으로써 죄를 뉘우치려는 용기를 보여준다.
사실은 그렇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결국 강함도 약함도 보기 나름인 것이다.
잘못
로드리게스 신부의 일본 선교행은(본 목적은 선교 활동이 아니었지만) 아직 험한 세상 겪어본 적 없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의 선택과 같아 보였다. 그곳의 현실은 알지도 못한 채 ‘난 할 수 있다’ 정신이 낳은 실수. 또한 그는 일본인에게 그들의 신을 완전히 이해시킬 수 있다, 전할 수 있다, 믿게 만들 수 있다고 착각했다. 참으로 오만한 생각이다.
종교의 진리와 보편성. 종교가 진리가 될 수 있는가, 아니면 단지 그들만의 문화에 지나지 않는가. 로드리게스는 자신의 종교, 자신이 믿는 신이 진리라 말한다. 모두에게 똑같은 진리. 그러나 페레이라 신부의 말처럼 일본인이 선교사들에 의해 받아들인 신은 신부가 전한 신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가끔 하나의 단어를 놓고도 그 단어에 대한 각자의 미묘한 의미 차이 때문에 원활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가 소통하기 위해 만든 규약인 단어도 사람마다 경험에 따른 차이가 생기는데 하물며 해당 국가에만 존재하는 어떤 종교가 타국에서 같은 형태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는가.
타국의 신부들이 들어와 선교 활동을 한 덕에 많은 천민의 목숨이 사라졌다. 극 속 대사처럼 신부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희생된다. 그들이 배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노우에가 천민을 죽인다. 원인 그리고 결과. 순서상으로는 맞아떨어지는 듯 보이지만 이 원인과 결과 사이에 하나(또는 그 이상이거나)의 원인 또는 결과가 숨어있다. 이노우에의 크리스천 탄압. 제대로 된 인과관계로 봤을 때 천민의 죽음은 로드리게스 신부가 배교를 거부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노우에의 탄압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