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에 돌란 감독의 단지 세상의 끝(2016)
자연스러운, 친숙한
자비에 돌란 감독의 작품에선 매번 인위적인 느낌을 받는다. 이번 작품에서도 쥐어 짜낸 듯한, 억지로 갖춰진 한 가족을 보았다. 영화에서의 이러한 인위성은 영화를 보다 영화적으로, 하나의 사건을 보다 집중적으로 보여주기 좋다. 그런 효과 덕분인지 돌란의 영화를 보면 다루는 소재가 비록 흔할지라도 다른 영화에 비해 ‘영화 같다’,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라는 말을 절로 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 작품과 그의 또 다른 가족 소재의 영화 <아이 킬드 마이 마더, 2009>에선 조금 다른 감상을 하게 된다. 이들 작품에선 인위적이고 극적인 분위기 속에서 친숙함, 익숙함까지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감상엔 소재가 미치는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재 하나만으로 돌란 감독 스타일에서 친숙함을 찾긴 어렵다. 이 영화에선 진짜 가족에 대한 그의 관찰력을 엿볼 수 있다. 이 관찰력이 발생한 디테일에서 친숙함을 넘어 공감까지도 이뤄질 수 있게 한다.
불화의 효과
두 번째 관람이었음에도 보기 힘들었다. 앙투안은 계속해서 상황을 악화시킨다. 긴장이 풀릴만 하면 그는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영화 안팎의 사람을 모두 가시방석에 앉혀버린다. 그저 빨리 이 순간이 지나 그곳을 빠져나오고 싶단 생각만 들게 한다. 불협화음. 앙투안이 만든 불화가 집에 모인 모든 이를 한 데 섞일 수 없게 한다.
초반까지만 해도 이들의 불화가 영화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긴장감 형성이 다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루이가 가족들의 마음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면서 불화는 다른 형태로 다가오게 된다. 서운함과 상처. 오랜 시간 큰 상처를 받은 이는 체념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한껏 날카로워진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보면 볼수록, 진심을 알면 알수록 불편함은 아픔으로 변하게 된다.
좁혀지지 않는 거리
끝내 그들은 가족이란 이름으로 가까워지지 못한 채 멀어진다. 그들은 극 안에서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으며 좁혀지지 않을 거리를 좁히려고 노력한다. 거리 형성은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글에선 루이에게 좀 더 집중하려고 한다.
루이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알려야 한다. 그러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가족, 특히나 형제들의 마음을 알게 될수록 더욱더 진실을 알리기 어려워진다. 더 큰 상처를 주게 될까 두려운 마음이 거리를 좁히고자 하는 시도와 거릴 더 벌리고자 하는 이중적인 마음을 형성한다.
상처
이 영화에선 유독 상처란 단어가 깊게 새겨진다. 아무 이유도 없이 나를 떠난 이가 돌아왔다. 그는 계속해서 시계를 보고 단지 세 마디를 던지며, 속을 알 수 없는 일관된 미소를 짓는다. 마치 잠시 머물다 갈 사람처럼, 이미 영원히 떠나버린 사람처럼 구는데 그런 그를 가족들은 붙잡고 싶어 한다. 이런 간극,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그들 사이에 오가는 마음의 크기 차이가 상처를 도드라지게 한다.
요즘 종종 그런 상처에 대해 생각한다. 누군가 또는 그들이 내 곁을 떠났고 그 뒤에 홀로 남아 그들이 떠난 이유를 계속해서 곱씹어보는 모습을. 그리고 그런 부질없는 이유 찾기가 스스로 상처를 주고 다음에 만날 인연에게 또 다른 상처를 받을 계기를 마련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겪는 이별이 유난히 그런 상처를 많이 낳는구나 하는 생각을 이 영화를 보면서도 하게 됐다.
새로운 집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곳, 상처줄 수 있고 상처받을 수 있는 공간, 나를 짓누르기도 하고 포근하게 감싸기도 하는, 긴장과 안정이 공존하는 그곳, 집. 우린 집이란 한정된 공간에서 수많은 기억을 쌓는다. 그 안엔 굉장히 복잡하고 다채로운 것들이 눌러 담겨 있는데 평상시에는 단순한 형태로 꺼내 보게 된다.
영화 등의 매체를 통해 평소 꺼내 보던 단순한 형태가 아닌 다른 각도, 다른 형태의 집을 마주할 때면 나라는 존재가 풍부해지고 깊어지게 된다. 분명 내 안에 있었음에도 모르고 있던 기억을 들춰내는 것만으로도 변화가 만들어진다. 그것이 비록 착각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익숙한 사고에 더해진 새로움은 의미의 무게를 더한다. 간접적으로 나의 존재 가치를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