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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Jun 02. 2024

흔들림 아래에서 점점 완성되어 가다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영국군의 탄압 아래 억눌린 1920년 아일랜드. 의사 데미언은 런던의 병원에서 일하기 위해 기차 플랫폼에 서 있다. 그리고 영국군이 만들어내는 폭력의 현장을 또 한 번 목격하게 된다. 억눌러 왔던 감정이 폭발한다. 친구들에게 겁쟁이 소릴 들으면서도 꿋꿋이 외면해 온 독립운동의 길, 이제 그 앞에 선다. 그리고 그 길을 향해 걸어간다.



목격의 순간에 피어나다


우린 저마다 중요시하는 것들을 끌어안고 산다. 안정적인 일상을 보내는 것, 내가 좋아하는 일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 부딪힘 없이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 지금의 일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런 소박한 것들. 소박하지만 내려놓기는 어려운 것들을 뒤로한 채 불안정한 일상의 길로, 내가 좋아하는 일 외의 것에 신경을 잔뜩 빼앗겨야만 하는 길로, 매사 타인과 부딪혀야 하며 예전의 일상과는 크게 벗어난 삶을 살아야 하는 길로 데미언은 발을 내디딘다. 지금의 길로 들어서는 데에는 유창한 설득의 말 따윈, 겁쟁이라는 놀림 따윈 필요치 않다. 억압과 폭력의 현장, 그 순간의 목격, 그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장면을 마주하며 얻어낸 폭발하는 분노와 무력하게 억압당하는 이들을 향한 아린 마음이면 된다. 그거면 내 남은 일생을 뒤엎기 충분하다.


많은 일이 목격하는 순간에 태어난다. 이성적으로 고민하고 계획하는 것은 방향을 잡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행동할 힘을 주진 않는다. 나아갈 힘은 살아있는 감정에서 온다. 크게 울어대는 감정이 내가 움직이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한다. 눈앞에서 직접 맞닥뜨린 현장은 그런 움직일 수밖에 없는 힘을 자아낼 감정이 내 안에서 터져 나오게 한다. 데미언이 마주한 영국군의 억압은 무던한 일상을 살고자 하는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그가 외면해 오던 험난한 길을 향해 움직이게 한다.



선의 생성과 소멸


난 어디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인가. 난 내가 이루고야 말겠다 각오한 길의 끝에 당도하기 위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인가. 데미언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정확하게는 가난한 이들이 적어도 영양실조에 걸릴 일은 없도록, 공평한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영국에 대항한다. 대의를 위해 아끼던 어리디어린 이의 목숨을 거둔다. 그는 첫 번째 선을 넘어선다. 아끼는 이들의 평안을 위해 한시적인 해결책이 아닌 영구적인 해결책을 택한다. 계속해서 싸운다. 어제의 동지를 적으로 두어야만 하는 불편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묵묵히 긴 싸움을 이어간다. 함께 생사를 오갔던 이들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 그는 또다시 한번 선을 넘는다. 그렇게 그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예전으로 되돌릴 수 없는 곳으로 자신을 내몬다.


기차 플랫폼에서 폭력을 목격했던 날, 독립의 길로 들어선 그날 그에겐 새로운 길이 열렸다. 그리고 그에 맞춰 새로운 선이 짜였다. 그는 평생을 지켜온 예전의 선을 넘어 새로운 경계선으로 나아간다. 새로운 선 안에 놓인 신념을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앞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지키고자 하는 것들을 지켜내기 위해 과거의 선을 뛰어넘어 그 너머의 땅으로 발을 내디딘다. 그는 잃어버린 옛 선을 추모한다. 그리고 조국과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이들을 위해 새로이 생성된 선을 직시한다.


내가 무너지지 않으려면 나를 지킬 울타리가 필요하다. 어떠한 행위 뒤에 그 행위가 옳았다 말할 수 있는, 명분이 되어줄 선이 필요하다. 내 과거가 타인에 의해 그리고 나 자신에 의해 부정당하지 않도록 경계선이 필요하다. 마지노선. 마지막 그 한계선은 내가 정해준 그 자리 그대로 뿌리 박힌 채 내가 흔들릴 때마다 무너지려는 나를 보듬어 안는다. 영원할 것만 같은 안정감을 준다.


우리의 울타리는 자라난다. 견고히 나를 지키되 앞으로, 옆으로 제 영역을 넓혀간다. 때때론 완전히 무너지고 다시 세워진다. 내가 더 넓은 곳에서 내달릴 수 있도록, 더 높은 곳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더 먼 곳을 우러러볼 수 있도록 넓고 높고 먼 곳에 새로운 경계를 세운다. 내게 진심으로 원하는 새로운 길이 열릴 때마다 나의 경계선은 영원한 머무름이라는 안주의 늪에서 빠져나와 앞으로, 옆으로 뻗어나간다. 과거의 것은 부서지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형태로 다시 쌓아 올려진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새로운 지점에 새로운 선이 내 인생에 둘어진다. 이러한 경계의 생성과 소멸을 우린 성장이라고 부른다. 데미언, 그는 과거의 선 앞에서 고민하고 결국 뛰어넘으면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의 진정성


"무엇에 반대하는지 아는 건 쉽지만 뭘 원하는지 아는 건 어렵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기 때문에 움직이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내가 '바로 지금이야!'라고 외치며 생각해 뒀던 방향으로, 오로지 나만의 힘으로 나 자신을 내달리게 했던 건 얼마나 될까. 있기나 했을까, 그랬던 순간이? 내가 그간 달려왔던 무수히 많은 길을 돌이켜 본다. 그 모든 길의 출발 지점이 순전히 나만의 힘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다른 무언가가 시작점을 제시하고, 그 길에 진입하게 하고, 앞만 바라보게 하고, 그대로 달려 나가게 한다. 달리다 보니 새로운 길에 익숙해지고 그것이 곧 나의 길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타의에 의해 생성되고 익숙해진 길로부터 나의 역사가 세워진다.


타의. 그래서 그동안의 선택과 현재의 위치가 의심스러울 때가 많았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이룩한 현재라서 지금의 시간을 계속 이어가는 게 맞는 건가 하고 의구심을 가질 때가 많았다. 나의 힘으로 길을 찾지 못하고 그저 남이 제시한 대로 따라가기만 하는 무력한 꼭두각시. 그런 꼭두각시의 눈으로 데미언을 바라본다. 그의 선택을 바라본다. 그가 자신의 선택에 따른 길 속에서 온갖 흔들림을 마주하면서도 묵묵히 나아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가 바라보는 길은 진심으로 택해진 길일까. 자신이 택한 그 길이 진정으로 내가 원한 길이라 확신할 수 있을까. 나를 흔들어대는 모든 순간 앞에서 당당히 자신이 택한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자신의 선택을 과연 끝까지 내가 원한 길이라 믿을 수 있을까.


시간을 조금 더 거꾸로 돌려본다. 데미언이 일생을 뒤바꿀 선택을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면을 목격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본다. 그는 애초에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애초에 가난한 사람을 향해 애틋한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었다. 그는 애초에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일랜드를 대상으로 영국이 만들어내는 폭력의 현장을 늘 마음속으로는 외면하지 못했다. 그는 한 장면씩 목격하면서, 한 장면씩 마음속에 쌓아가면서 서서히 행동할 힘을 응축시켜 왔다. 그렇게 억눌러왔던 감정이 터져버린 순간 억눌러왔던 힘도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는 그가 목격했던 폭력의 현장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인 사람이 아니다. 순간적인 계기로 발화하였다가 금세 꺼져버리고 마는 그런 단순한 열정을 가진 이가 아니다. 그가 실제로 움직이게 된, 독립운동의 길로 발들이게 된 건 그날의 목격 때문만은 아니다. 그 선택이 발화하게 된 데에는, 그 선택이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게 된 데에는 그가 살아왔던 지난 모든 나날과 그를 이루고 있는 모든 기질이 그를 향해 계속해서 속삭여 왔기 때문이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 안타까워하는 이들을 폭력과 불평등으로부터 구하라고.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맞서 싸우라고. 그들이 다치지 않게 지키라고. 그는 계속해서 원해왔다. 사람들이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공평한 기회를 누리며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그가 걷고 있는 그 길은 그가 진정으로 원했기에 그의 앞에 펼쳐졌다. 그는 결국 자신의 진심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의 흔들림은 결국 영원히 멈추게 된다. 그가 흔들림 없이 영원히 굳건하게 지금 마음 그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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