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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May 25. 2024

가난한 노동자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존재한다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


그럴 수밖에 없는 인생에 대해


가끔 누군가의 결말은 꼭 그렇게 맺어질 수밖에 없었겠다 싶을 때가 있다. 나라는 사람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자리할 수밖에 없었던 지난 나의 역사가 그렇다. 그동안 만나왔던 이들과, 그들과의 관계와, 그 안에서 내가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그렇다. 조영래 변호사는 한 노동자의 일생을 차근차근 되짚어낸다. 전태일이 그러한 형태로, 그러한 마음으로, 그러한 결말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히기 위해 그의 역사를 조명한다. 그의 지난 삶을 통해 그가 지핀 불길에 왜 한 치의 거짓도 존재할 수 없었는지를, 순수하게 진심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의심 많은 우리를 향해 강력히 주장한다.


전태일은 가난하고 불안정한 삶을 살았다. 조금은 나은 때도 있었지만 보통은 힘든 나날들이었다. 배부른 날도 없었고 살기 적당한 날도 없었다. 그러나 바랐던 것 단 하나를 이뤄냈던 날은 있었다. 학교를 가고 그곳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날. 순수하게 열망해 온 배움이 있는 그곳에서 그는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었고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 땐 그 누구보다 절망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오롯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에 그토록 바랐건만 그 작고 소박한 희망마저 가난은 부숴버리고 만다. 이때부터였을까? 그가 남들처럼 점점이 흩어진 낱알 같은 순간을 단순하게 엮어 만든 게 아닌 하나, 단 하나에 오롯이 일생을 바칠 수 있는 그런 응집력 있는 삶을 살게 된 것이. 이때부터일 것이다.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하는 가난한 노동자의 아픔을 볼 때면 자신이 더 큰 아픔을 느끼게 된 것이.


전태일은 언제나 사람이었다. 그 힘든 현실 속에서도 그는 기어코 짐승도, 기계도 되지 않았다. 언제나 올곧게 사람이었다. 자신의 기준을 찾고, 원하는 것을 얻고자 노력한 사람이었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줄 알고, 옳지 못한 것에는 용기를 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사람이기에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았을 테고, 그것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느꼈을 테고, 그래서 더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사람이기에 잘못된 것을 바꿔야만 한다고 우리도 사람 대우받아야 한다고 믿고 그리 행동했다.



가난한 사람의 눈에 비치는 세상에 대해


당장의 생존 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선 나 자신 말고는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알면 알수록 관심이 더해진다지만 그건 내가 여유 있을 때의 얘기지 내 앞길이 구만리일 땐 그런 앎에서 오는 관심마저 신경질적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내가 힘들 땐 타인의 힘듦에 대한 공감으로부터 오는 고통, 그리고 이를 외면하는 데서 오는 죄책감이 계속해서 신경질을 돋운다. 그래서 더욱더 완강히 타인의 아픔을 배척하고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가난은 드물게 누군가에게로 가 삭막함이 아닌 사랑과 관심을 낳곤 한다. 간혹 어떤 이에게는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보다는 타인이 더 눈에 밟히기도 한다. 내 힘듦보다 타인의 힘듦이 더욱 견디기 어려운 마음도 이 세상엔 존재한다. 대부분의 이들에게나 가난이라는 것이, 한없이 부족한 여유가 타인을 향한 신경질만을 낳는다지만 전태일과 같은 이들에겐 이는 타인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창에 불과하다. 내가 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들의 작은 것 하나까지도 들여다보게 되고 내가 혹여나 피치 못할 상황으로 인하여 당장은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더라도 반드시 훗날 이들을 위로할 세상을 열기 위하여 다시금 이들의 아픔과 마주한다.


이처럼 가난이란 경험이 무조건 냉혹하고 이기적인 눈만 키워내는 것은 아니다. 좋은 사람, 진정한 사람에게로 간 가난은 그에게 타인을 향한 관심과, 굳은 의지와, 진실함을 키운다. 전태일은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가난이란 혹독함은 그에게로 가 그의 인간성을 키워내는 데, 그의 눈이 저 깊고 아득히 먼 곳에서 홀로 고통받는 자들에게까지 가닿게 하는 데 그 쓰임을 다한다.



가난한 노동자의 철학과 예술에 대해


철학자가 아닌 이들에게도, 당장을 살아내기 힘든 가난한 이에게도, 너무나 고되어 숨 한 번 제대로 고르기 어려운 노동자에게도 그만의 철학이 자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만의 예술을 창조할 수 있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 나 자신에게 놀랐다. 전태일이 철학자이자 예술가일 수도 있음에 놀란 나 자신에게 놀랐다. 가난한 노동자도 당연히 자신만의 기준으로 세상을 정립할 수 있다. 가난한 노동자도 당연히 자신이 꿈꾸는 세계를 글로써 그려낼 수 있다. 그러나 난 왜 이 책을 읽기 전엔 그들이 그럴 수 있다고는 생각지 못하고 그의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모습에 그만 놀라고 말았는가.


어쩌면 노동자야말로 인간 감정의 저 깊숙이까지 느낄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좋을 땐 삶의 깊이가 덜하다. 삶에 의심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우린 어려움에 부딪히고서야 비로소 좋았던 날을 다시 곱씹어보고 그날이 옳아서 좋았던 건지, 그저 운이 좋아 좋았던 건지를 의심하게 된다. 그렇게 삶의 깊이를 채워간다. 전태일은 어려운 삶만 골라 살아온 사람이다(이 책에서 마주한 전태일은 그리 보인다). 그에게 매 순간 불행한 자신과 가혹하기만 한 현실을 생각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날이 며칠이나 있었겠는가. 그러니 그는 우리처럼 평온한 날이 다수인 사람보다는 더욱 깊이 있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


이러한 삶에 대한 깊이는 철학과 예술에서도 그 깊이를 더한다. 좋은 말로만 포장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막연한 상상으로는 채울 수 없는 영역이 엄연히 존재한다. 실제로 겪어낸 슬픔은 단순히 슬프다는 말에서 그쳐지지 않는다. 더 구체적인 표현으로 혹은 이를 더 완연히 느끼게 하는 또 다른 표현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너무 뼈저리게 그 고통을 아는 자는 단순하디 단순한 슬프다는 표현에서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삶의 깊이로 인해 감정의 표현이 한발 더 나아간 자는, 전태일은 우리보다는 더 나은 철학자, 더 나은 예술가가 된다.



한 사람의 진심에 대해


인간에게 있어 의지라는 능력은 꽤 높이 평가된다. 인간의 의지가 지난날과는 다른 오늘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한 개인에게, 환경도 운도 따라주지 않는 한 노동자에게, 주위를 둘러보아도 더 나은 삶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아득히 먼 저 밑바닥 인생에게 의지가 해낼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굴레와 되살리려 해도 자꾸만 꺼져가는 더 나은 삶을 향한 희망의 불길은 무력한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바꿀 수 없었다. 결국 그의 강렬한 의지, 수없이 굳건히 지키려 노력했던 그 의지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명을 불태움으로써 끝을 맺게 된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의 불타던 열정은 서서히 꺼져간다.


나는 진심 어린 마음을 좋아한다.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일 중 가장 대단한 일은 자신의 진심을 잘 알아채고 그 진심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매사 진정성 있는 삶을 살아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진심 어린 마음은 맹렬하고 무자비한 시대 앞에,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 앞에 일순간은 잊힐 수 있다. 그러나 진심은 언제나 통한다 했던가. 때가 되면 이 진심이란 것은 사라지지 않고 기어이 다시금 고개를 들고야 만다.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영원한 것이기에 전태일의 진정성이 깃든 의지는 잠시는 숨죽였을지언정 결국 때를 만나 다시 타올랐다. 그리고 과거 새까맣게 타버린 그의 굳은 의지는 오늘날 우리의 노동 현장에 새로운 생명을 불러일으켰다.


누군가의 간절함은 그만큼의 폭발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진심으로 너무나 강렬하게 원하는 것을 위해 노력하는 삶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수많은 것들로 이루어진 이 세상에서, 조금만 고개 돌려도 나를 샛길로 잡아 끌어내리는 것들이 만연한 이 세상에서, 이 복잡하고 불안하여 집중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단 하나를 위해 모든 열정을 다 바칠 수 있는 삶은 평생을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아름다운 불꽃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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