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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May 18. 2024

개인의 역사에 대해

김주혜의 작은 땅의 야수들


인생과 이야기


동일한 사람에 대해서라도 실제 그의 삶과 지난 날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느낌을 준다. 실제 눈 앞에서 목격하고 있는 나의 삶은 고상한 맛이 덜한 반면 이야기는 종종 압도감, 그 내면에 압축되어 있는 힘을 느끼게 한다. 실제는 각각의 요소가 정리되지 못한 채, 분류되지 못한 채, 자신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여기저기 널려 있는 반면, 이야기는 나라는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 아래 맥락을 갖추고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에게 내 지난 날의 삶이 어떤 웅장하고 고고한 힘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나에 맞춰 정렬된 이야기는 막 내던져진 순간들에 의미를 찾아 준다. 내가 가장 나 다워질 수 있게 하고 내가 기대하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서게 한다.


이야기에 시간이 더해진다면 애뜻함 마저 더해진다. 실제는 생생하게 살아 있어 어떻게든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을 주지만, 이야기는 어제까지만 해도 살아있던 어떤 것이 죽어 박제돼 버린 채 다시는 회복할 수 없게 된 것을 그리워 하게 한다. 그렇게 살아있던 자의 지난 이야기는 고고하고 웅장하게 오는 한편, 아련하고 먹먹하게도 온다. 돌이킬 수 없는 길을 찬찬히 밟아 나가는 이들의 돌이킬 수 없는 지난 날은 아련하고 먹먹하다.


순간 속에 살아있는 옥희의 생동력 있는 선택과 경험은 당시엔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찾지 못해 방황했을 것이다. 생생하게 살아 숨 쉬었던 이 모든 옛것은 옥희 할머니가 오늘날 우리에게 이야기로 들려준 지금에서야 비로소 지금의 옥희라는 인간에 알맞은 형태로 제자리를 찾게 된다. 정리된 것은 더 잘 보이고 더 잘 들린다. 옥희는 힘든 시대를 사랑이라는 아름답게 덧칠된 감정으로 버텨냈구나, 그러나 마침내 잔혹한 현실 속에서 아름답게만 보이던 사랑의 이면을 마주하게 되는구나 하는 것들 말이다.


현재에 살아있는 옥희는 원하는 바대로, 순간의 생각과 행동이 반응하는 대로 인생을 이끌어 간다. 그러나 훗날의 옥희가 과거에 살아있던 자신을 떠올리며 우리에게 전하는 지난 날의 이야기는 살아있던 날의 선택으로 인해 훗날 놓치게 될 모든 것들을 한 번에 집약하여 보여준다.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 그래서 우린 소중히 움켜쥘 수 있었을 어떤 것들이 그의 손 아래로 서서히 새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들으며 시간의 무자비함과 그로 인해 한 인간이 겪게 되는 먹먹함에 더 큰 슬픔을 느끼게 된다. 시간을 먹은 지난 날의 빛바래진 이야기는 당시의 즐거움도, 슬픔도, 분노도 모두 아련한 마음으로 마주하게 한다.



인연


당장 내 눈앞의 인연에 대해 설명하라 할 때면 나는 종종 맺어지고 끊어짐에 집중하여 말하곤 했다. 그러나 찬찬히 그들과의 인연을 떠올려 보면 연결 여부보다는 다른 데 의미를 둬 왔음을 깨닫게 된다. 나는 함께하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나 자신을 정의한다. 나는 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만나고 있는 누군가를 통해 나를 간접적으로 목격한다. 그가 나와 닮았기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더 눈에 띄었을 테고 나와 잘 통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친해졌을 테니까.


그가 지금 당장의 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보다 먼 미래의 나를 비추고 있을 수 있다. 내가 닮기를 희망하는 모습이 그에게 있어서 일 수도 있고 그와 함께한 시간 동안 그의 모습이 내 안으로 서서히 스며 들어서 일 수도 있다. 나와 인연이 닿아있는 모든 이는 나의 조각조각들을 이어 붙인 하나의 거울이다. 나의 존재는 나의 모든 인연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인연은 나에게로 와 닿는 순간 의미가 생길 수밖에 없다.


옥희의 첫 인연은 가난한 부모이다. 그는 이 가난한 어머니로부터 적게나마 소소한 사랑을 받았다. 기생이 되어서는 새로운 가족을 만나게 된다. 그는 비록 그들과의 최초의 마주침에서 부정적인 시선을 받게 되나 점차 그들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한다. 점점 사랑받게 된다. 기생으로서 대중에게 나섰을 땐 많은 이들의 주목을, 사랑을 받게 된다. 그녀는 매 순간 만나는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이라는 영향력을 받게 된다. 그는 그동안의 인연들에 의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것들 중 유독 사랑에 더 주목하게 된다.


옥희의 이야기는 사랑이라는 실로 꿰어져 있다. 좋은 시절 그의 다양한 인연들은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그에게 실어 보냈고 그들은 그로부터 사랑스런 미소를 돌려받았다. 힘들었던 시기 그리고 인연들이 하나둘 그의 곁을 떠나가던 시기엔 사랑이 깨부숴져 버리는 광경 아래 시린 아픔을 겪게 된다. 그를 거쳐 간 모든 인연이 그에게 사랑으로 빚어진 흔적을 남겼다. 맺어지든 끊어지든 모든 인연이 그에게 다채로운 사랑의 의미를 새겼다.



작은 땅의 야수들


냉혹한 야생은 우리를 인간으로 살기 힘들게 한다. 지금의 이 순간을 무사히 잘 넘길 수 있도록, 어떻게든 살아남아 내일을 마주할 수 있도록 그저 생존 하나에만 시선을 내리꽂은 채 앞만 바라보며 내달리게 한다. 그 옛날 짐승이던 우린 오랜 세월을 거쳐오며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이 작은 땅 위를 살아오던 이들은 인간의 손에서 탄생한, 야생보다도 더 거칠고 잔혹한 인공 야생 환경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는 이제는 인간이 된 우리 안에 숨겨져 있던 오래전의 짐승을 끄집어낸다. 인간으로 살아오며 키워온 다채로운 감각은 점차 메말라 간다.


다행히 이 삭막한 시기에도 사랑은 살아남았다. 비록 사랑마저도 이 시기를 버거워하며 서서히 메말라 갔지만 완전한 멸종을 맞이하진 않았다. 사랑은 우리가 다시 한번 인간으로 나아가게 한다. 자꾸만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는 험난하기만 한 환경 속에서도 사랑은 우리가 인간임을 일깨운다. 내 감각은 언제든 사랑 속에서 희로애락 모두를 느낄 수 있다. 사랑에 의해 되살아난 다양한 감각은 나의 의미, 내가 왜 중요한지, 내가 무엇을 위해 살고자 하는지, 내가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나의 존재에 의미라는 무게를 실어준다.


한 사람을, 두 사람을, 열 사람을, 이 작은 땅 위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래서 우리가 꼭 지켜내야 한다. 우리가 인간일 수 있게 하는 마지노선이기에 지켜져야만 한다. 옥희의 사랑도, 정호의 사랑도, 명보의 사랑도 다른 모든 극중 인물의 사랑도 그 사랑의 끝이 어디든, 몇 명을 향한 것이든 관계없이 지킬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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