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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May 11. 2024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의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애정의 조건


"고요를 좋아하지 않으면 사랑은 없다. 사랑은 행동, 소유, 사용이 아니라 존재에 만족하는 능력이다."


책의 내용은 모두 좋았으나 그중에서도 유독 이 '고요함'에 대한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그동안 만난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여유로움'이 있었다. 이 여유라는 게 그저 행동이 느긋하다는 걸 뜻하는 게 아니다. 불안을 느낄지언정 이를 다스릴 줄 알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 나감에 있어 조급함이 느껴지지 않으며, 매순간의 과정을 찬찬히 눈여겨 보고, 이로부터 자신을 채워 나갈 여력이 있는, 외부로부터 영향은 받되 자신의 견고한 중심 아래 이 외부 자극을 적절히 잘 수용하고 활용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여유로운 사람은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지 않단 점을 짚고 넘어 가야겠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여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왜 좋아하고, 왜 싫어하는지, 지금 난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를 명확히 안다. 그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부에 의해 덜 흔들린다. 가고자 하는 내면의 방향이 뚜렷하고 내면의 소리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밖에서 누가 어떤 소릴해도, 다른 이들이 나와 다른 방향성을 가지더라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주목을 받더라도 온 신경이 나로 향하기에 배제와 격리에서 오는 불안이 크지 않다. 가만히 앉아 멍하니 있어도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평화롭다. 다른 이들과의 대화 중 침묵의 공백이 생겨도 괴롭지 않다. 침묵은 이전의 대화를 되새겨 보고 다음의 대화가 더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는 순간일 뿐이기에.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조건


무력감과 권태로움은 내가 스스로에게 원하는 것과 현실 속 게으른 나 사이에 일어나는 불일치 아래 다가온다. 현실의 내가 이상적인 나를 만족시켰다면 그럭저럭 이 무력의 위태로움을 무사히 건널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비난과 죄책감에 갇혀 그 다음을 도모하지 못할 것이다. 압박감에 짓눌리면 우리의 귀는 내면의 소리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남의 말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린다. 안과 밖을 중재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순간 무력감과 권태로움이 나에게로 찾아온다. 이때부터는 자유를 박탈당한다. 내가 내리는 선택은 나로부터 기인한 게 아닌 누군가의 대리선택이 되고 만다. 내가 느끼는 감정 또한 내가 소유한 감정이 아닌 누군가가 원하거나 옆사람 혹은 옆옆사람의 감정이 전이된 것일 뿐이다.


요즘은 시간을 잘게 나눠 매순간을 알차게 채우면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나를 위해 일단 때려 넣는다. 그리고 무작정 달린다. 필요하기에 채운 시간이라면 다행이나 그저 빈 시간을 손 놓고 바라보기 겁이나서 채운 것이라면 나의 삶을 위한 게 아닌, 바삐 돌아가는 현대 사회의 여느 현대인처럼 스스로를 소몰이하듯 꾸역꾸역 끌고 나아가는 것이다. 자신이 옭아맨 굴레를 따라 어제처럼 그제처럼 기계 같이 움직인다. 다른 이들 눈에 비춰질 알짜배기 인생을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멋진 나 자신의 모습에 취해 오늘도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러나 이는 그저 삶을 통제하겠다는 욕심에 불과하다. 억지로 나아가는 삶은 가면 갈수록 시들해진다. 진정한 마음을 담지 않은 채 욱여넣은 시간은 자신의 감정을 갉아 먹는다. 즐거움과 설렘은 사그라들고 불만이 자리한다. 그러면 무력감이 찾아온다. 이 무력감을 이겨 내려고 분노를 택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자신을 향한 분노일 때도 있고 타인을 향한 분노일 때도 있다.


삶을 사랑하는 듯 보이는 사람은 시간을 강박적으로 채우지 않는다. 그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지금의 대화가 즐거워서, 그냥 이 순간이 만족스러워서 저절로 시간이 채워진다. 물론 약간의 억지성은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평소 편하고 익숙하던 것만 해선 다채로움의 원천을 잃은 채 반복적인 삶을 사는 기계가 되어 버리니까. 다시 말해 성장하지 못하니까. 그러나 삶을 향한 과도한 통제와 압박은 피해야 한다. 요즘의 우리가 삶을 통제하려는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남은 나날이라도 행복하기 위해, 나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볼 필요가 있다. 강박의 늪에서 벗어나려면 난 당장 무엇부터 손에서 놓아 주어야 하는가? 그렇게 한 번의 고민과 한 번의 놓침을 반복해보자. 그렇게 내가 지금 붙들고 있는 것을 하나씩 놓아주자. 그리고 비어버린 손에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쥐어주자.



생명의 힘을 얻기 위한 조건


삶에 있어 살아있음과 죽어있음의 경계가 다소 추상적이기는 하나, 그럼에도 그 기준선을 굳이 고민해 보자면 '집중력'과 관련있지 않을까 싶다. 나에게 집중한다는 것은 그저 흘려보낼 법한 생각도 붙들고 고민해 본다거나 무심코 하고 있는 행동 하나하나도 들여다 보고 매순간의 과정을 인지해보는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 나를 건강하게 하는 것에 집중하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보는 것이다. 내가 현재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정확히 알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가끔은 익숙하여 당연시 해오던 자신을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날려보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집중을 통해 발견해낸 것들은 다음에 있을 선택의 순간에 실제로 적용한다. 그리고 이 과정들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선택 이후의 나에게 또 다시 집중하고 또 다시 나를 발견한다. 관찰, 발견, 적용의 굴레는 나에 대한 앎의 영역을 나날이 풍부하게 한다. '알면 알 수록 사랑하게 된다.' 생명력은 집중하여 얻은 앎, 즉 관심에서 출발한 사랑에 의해 탄생한다. 사랑은 행복과 즐거움을 만든다. 심장을 뛰게 하고 설렘 속에 내일을 기다리게 한다.


새로운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인 성장과 무엇가를 만들어내는 창조 또한 삶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성장의 형태로든 창조의 형태로든 변화가 생긴다면 우린 살아있는 것이다. 어제는 없던 무언가가 나에게로 와 자리를 잡고 나를 자극한다면 나의 삶은 생명력을 띤다. 이러한 성장과 창조에서 발현되는 변화는 집중을 통한 진정성 있는 관찰과 통제에 대한 압박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생겨난다. 나와 내가 마주한 이 세상을 다각도로 바라보고, 자세히 들여다보고, 부족하면 다른 이들이 미리 찾아놓은 정보도 참고하다보면 우린 너무나 무한하여 마를래야 마를수 없는 성장과 창조의 원천을 갖추게 된다. 또한 삶을 향한 통제의 압박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이 원천의 수문을 자유자재로 여닫을 수 있게 된다. 원천을 끊임없이 채우고, 원천에 자유로이 오갈 수 있게 된다면 우린 늘 변할 수밖에 없는, 살아있는 삶을 얻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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