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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May 04. 2024

결말에 도달하지 못한자는 무의미를 얻는다

샘 멘데스 감독의 1917(2019)

세계 1차대전, 프랑스. 후퇴하는 독일군과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뒤쫓는 영국군. 정정한다. 후퇴하는 척하는 독일군과 이들이 놓은 덫에 걸려들기 직전인 영국군. 그리고 두 사람이 있다. 덫을 향해 나아가려는 아군 1,600명의 발길을 돌이킬 수 없어지기 전에 돌려세우고자 하는 두 사람. 그들은 아군이 거짓 연기 중인 독일군을 뒤쫓지 못하게 공격 중지 명령을 전달해야 한다. 이 막대한 명령, 너무나 중요하고 절실한 이 명령서를 수많은 생명을 위해 전하러 간다. 목숨을 헛되이 잃을 예정인 1,600명 중 한 명을 형으로 둔 친구와 함께 스코필드는 무거운 책임을 안고 그들에게로 간다.




결말


스코필드에겐 이 모든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독일군으로부터 지켜내고자, 빼앗아 오고자 하는 땅은 내 조국(영국)의 땅이 아니다. 내 이름의 값어치를 드높일 수 있는 훈장은 당장의 목마름 앞에선 와인보다도 못한 쇠 쪼가리에 불과하다. 방금까지 살아서 함께 했던 이들은 몇 초 후면 부질없이 사라지고 만다. 무엇을 얻기 위한 싸움인지도 모른 채 그저 앞만 바라보며 무작정 내달릴 수밖에 없는 세계에 모두가 갇혀있다. 어쩌면 이 전쟁의 시작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그 있었을지도 모를 의미가 사라져 버렸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간절함과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 내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친구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적들과의 마주침에서 얻게 될 두려움과, 상처로 인한 고통과, 잠깐만이라도 평온함에 머무르고픈 지친 몸과 마음을 가린다. 그리고 무작정 앞을 향해, 결말을 향해 쉼 없이 달리게 한다.


영화의 시작에서 우린 스코필드에게 이런 결말을 기대한다. 명령 수행 완료. 독일군의 덫에 1,600명의 아군이 빠지지 않도록 이들이 적을 향해 달려 나가지 못하게 막을 것.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 헛되이 생명을 버리지 않게 할 것. 죽음을 앞둔 수많은 이들 중 한 명인 친구의 형 또한 죽음에 내몰리지 않게 함으로써 친구가 슬픔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할 것. 최초로 그려낸 결말은 이처럼 간단명료하다. 스코필드, 그가 죽지 않고 살아서 공격 중지 명령을 잘 전달한다면 그는 원하는 결말에 도달할 수 있다. 그 끝에서 그는 많은 이들의 생명이라는 값진 의미를 얻을 수 있다.


영화의 끝에서 우린 앞선 결말을 지우고 새로운 결말을 다시 그리게 된다. 전쟁 종결.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잠시 멈출 순 있어도 언제고 다시 시작되고야 만다. 오늘 살려낸 이들은 내일이고 모레고 결국 죽는다. 또 다른 결말을 그려야 할 수도 있겠다. 죽음. "오늘은 끝날 거란 희망이 있었다. 희망은 위험한 거지. 다음 주면 다른 명령이 내려올 거다. 이 전쟁을 끝내는 길은 하나뿐이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죽는 거지." 물론 현실의 우린 영화 속 이들이 말하는 전쟁이 결국엔 끝을 맞이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매일 희망 고문에 시달리던 이들에게, 적어도 이 영화에 온전히 몰입한 관객에겐 이들의 전쟁은 끝을 맞이하지 못한 채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하나 남은 이의 목숨마저 거둬들일 때까지.



죽어버린 기대


집. 가족. 힘든 순간 가장 강렬해질 마음,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 힘들 때면 자연스레 가족이 있는 집과 그들의 품에 돌아간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그런 그림이 자주 그려질수록, 자주 힘들고 치질수록 집을 향한 간절함은 더욱 강렬해진다. 그러나 스코필드는 집에 가기 싫다는 말로 이러한 자연스러운 그리움과 간절함의 마음을 외면한다. 어차피 집에 돌아간다 한들 계속 그곳에 머무를 수도 없거니와, 다시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할수도 있다는 생각이 가족들이 있는 집과 그들과 함께할 평온한 날들을 기대하지 못하게 한다.


죽은 체리나무. 죽은 개. 죽은 소. 죽은 사람들. 독일군이 휩쓴 자리에 남은 모든 생명의 죽음. 그는 가는 길마다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한 때 의미를 지녔던 것들이 숨과 함께 의미 또한 멎어버렸다. 이 모든 무의미해진 것들은 이를 목격할 이들이 가슴 안에 소중히 품고 있을 의미를 갈아먹는다. 너네도 곧 이리 될 것이다, 너네도 우리와 같이 무의미의 길로 엇나가게 될 것이다 하는 식의 말을 살아있는 자들에게 던진다. 살아있는 자의 살아있는 의미는 죽은 자의 죽어버린 의미를 서서히 닮아갈 것이다. 의미로 작동하던 기대감의 의식 또한 서서히 흐려질 것이다.


생존. 버텨냄. 이겨냄. 전쟁은 살아오면서 중요시 하던 것들은 지우고 그 자리에 생존, 꼭 살아남아야겠단 의지 하나만 남긴다. 전쟁의 바깥,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린 많은 것들을 중요시 한다. 오늘은 이 영화 꼭 봐야지, 내일 가족들과 어디에 놀러가야지, 이번 주까지 이 일을 기필코 해내야지 하는 단순한 것들부터 내년엔 이걸 이뤄야지, 아이가 생긴다면 내 아이에게 이런 부모가 되어야지, 내가 죽는다면 이런 모습을 모두의 기억 속에 남겨야지 하는 다소 추상적인 것들까지 나의 현재 안에 넣어뒀다가 생각날 때마다 꺼내본다. 이런 수많은 중요한 것들은 우리가 내일을 기대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전쟁은 생명과 함께 그간의 중요했던 것들, 기대하는 마음을 죽여버린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에게 하나만 남긴다. 생존. 중요한 게 생존뿐인 삶은 죽음의 현장을 목격했을 때 쉽게 무너진다. 살 수 있을 거란, 이 모든 걸 끝낼 수 있을 거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기대를 무너뜨린다.



무의미의 향연


앞서 남긴 매켄지 중령의 대사, "오늘은 끝날 거란 희망이 있었다. 희망은 위험한 거지. 다음 주면 다른 명령이 내려올 거다. 이 전쟁을 끝내는 길은 하나뿐이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죽는 거지."를 통해 전한 것과 같이 이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영화 내에서는 말이다). 공격 중지 명령을 무사히 잘 전달했어도, 전달하지 못했어도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이가 명령 한 마디에 꼭두각시처럼 움직인다. 싸우라면 나가 싸우고, 후퇴하라면 되돌아오고. 운이 좋다면 살아남을 수도 있으나, 운이 나쁘다면 옆의 시체처럼 자신 또한 싸늘한 주검으로 그 자리에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오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전쟁을 끝맺겠다 마음먹어도 전쟁은 결코 끝이 나지 않는다.


처음 그렸던 전쟁의 결말은 오랜 체류의 시간 속에서 점점 옅어진다. 끝나지 않는 것. 종결의 소멸. 영원할 싸움과 영원할 누군가의 죽음. 이 모든 것들로 인해 무의미를 느낀다. 우린 일이 마무리되었을 때야 비로소 그 과정과 결과물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반면 일을 끝맺지 못했다면 그 과정에서 얻은 것들, 감정들 또한 종결의 의미를 얻지 못한다. 영원한 보류 상태에 빠진다. 이들의 전쟁은 보류 상태이다. 어느 하나도 끝을 맺지 못했기 때문에, 그 끝에 다다르지 못했기 때문에 확실한 의미를 얻을 수 없다. 불행히도 오늘 숨이 붙어있는 자들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전쟁의 끝자락으로 인해 무의미의 무게에 또 한 번 짓눌린다. 그렇게 의미의 세계와 또 한 발 멀어진다.


다행히도 숨이 끊어진 자들은 전쟁의 끝남에 관계없이 의미를 얻는다. 요단강을 건너면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와, 내 집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 영원한 평온함을 얻을 수 있다. 전쟁을 포함한 모든 것이 이들 죽은 자들에겐 철저히 종료되기에, 돌이킬 수 없는 모든 것의 종결이 완전한 의미를 선사한다. 이미 죽은 자들에게, 그 의미의 기쁨을 느낄 수 없는 자들에게.



다시 희망하는 유의미


스코필드, 그는 지금 당장은 살아남았고, 그 덕분에 많은 이들 또한 지금 당장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들의 생명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싸움은 그렇게 또다시 미뤄졌다. 이들 생명의 종결 또한 다시금 미뤄졌다. 이 끈질긴 전쟁의 연장선에서 어쩌면 우린 조만간 스코필드가 영원한 의미를 찾게 될 거란 희망을 걸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죽은 자가 얻을 완전한 의미를 그의 죽음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총과 칼은 피했을지언정 감염마저 피할 수 있을 만큼 운이 좋을 거란 기대는 되지 않는다. 시작부터 상처 입은 손과 그 손에 적셔진 썩어가는 시체의 피라니. 많은 이들을 살렸을 때도, 친구의 형이 살아있음을 확인했을 때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공허했다. 그리고 이 공허함은 이들의 싸움처럼 영화 또한 끝나지 않게 했다. 그러나 스코필드가 무의미의 늪을 빠져나올 수도 있겠단 생각에 이르니 다른 건 몰라도 영화는 끝이 났음을, 이제야 이 영화의 종결로부터 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단 희망을 얻었다.


죽은 체리 나무는 완전한 죽음으로 이르지 않는다. 체리가 썩고, 묻히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베어진 채로 죽어버린 체리 나무보다 더 많은 체리가 자란다. 친구를 잃은 곳에서 얻은 우유가 앞으로 자라날 아기에게로 가 삶의 의미를 찾게 되듯 생명이 사라진 자리에서 새로운 희망을 얻을 수도 있다. 앞으로를 살아갈 이는 죽은 이를 떠나보낸 지점, 생명이 끝난 지점, 죽은 자가 의미의 결실을 본 그 종결의 지점에서 앞을 향해 나아갈 희망을 얻을 수도 있다. 내게 존재의 의미가 없던 생명의 죽음은 무의미를 불러오는 반면, 내게 존재의 의미를 지녔던 생명 혹은 마주한 순간에 이르러서야 의미가 생겨난 생명의 죽음은 되려 의미와 희망을 낳는다.


살아남은 이에게 남겨진 가버린 이의 무게와 그만큼의 슬픔은 무력을 낳는다. 네 숨이 끝에 다다라 너만의 의미를 찾고 사그라들었을 때, 난 너를 영영 떠나보내 버린 데서 오는 슬픔과 살아생전 해결되지 못할 그리움으로 무력해진다. 무력은 죽음을 부른다. 그래서 무력이 찾아온 이때 우린 그럼에도 이 모든 것들에 의미가 있었다 최면을 건다. 안다. 죽음의 안타까움 속에서 어떻게든 슬픔을 이겨낼 무엇이라도 찾아내려는 이 가상한 노력이 부질없어 보일 수 있다는걸. 그럼에도, 끝맺지 못하여 살아있는 동안 유의미의 세계에 발 들일 수 없다 할지라도 생존하고 싶다. 기어이 버티어 살고 싶다. 압도적인 슬픔의 무게를 외면해서라도 삶을 이어가고 싶다. 그래서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잡아보려 발악한다. 그 실낱, 죽음이라는 생의 마지노선에 이른 자에게 부여된 의미가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 말한다. 의미 있는 죽음으로 슬픔을 걷어낸다. 그리하여 살아남은 자는 무의미의 구덩이에서 힘을 내어 앞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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