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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May 12. 2024

내 것이 아닌 것을 탐내다

우디 앨런 감독의 블루 재스민(2013)

재스민. 그녀는 연상의 부자 남편을 만나 상류층의 삶을 누린다. 우아하고 고고하게 빛나는 인생을 즐긴다. 그리고 무너진다. 남편은 사기꾼으로 전락했다. 그와 함께 자신도 밑바닥을 향해 걸어 내려간다. 이런 현실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던 그녀는 우아함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부유한 남자를 찾는다.




이상의 세계


이따금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그려보곤 한다. 아름다울 나의 삶, 당장은 내가 부족하니 조금씩 노력해서 언젠가는 당도했으면 하는 이상적인 그림을. 난 오랫동안 고요하고 평화로운 사람을 동경해 왔다. 어떤 날에도, 어떤 이와의 만남에서도 흔들림 없이 늘 고고하게 온화한 미소를 살포시 지어가며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가는 그런 우아한 모습을 띤 사람을 닮고 싶었다. 그 우아한 모습의 사람은 험악한 일 속에 놓이더라도 매번 부드럽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이끌어갔다. 나에게 있어 그들의 여유로운 말투와 몸짓은 어른스러움으로 읽혔다. 그들의 부드러운 이끎은 아름다움으로 느껴졌다. 무엇이 자신을 덮치더라도 지혜롭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어른의 모습과 아무리 잔혹한 위기가 들이닥치더라도 부드럽게 흘려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아름다운 지휘자의 모습.


재스민도 그런 어른스러움을 꿈꿨을까. (아마도) 양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채 성장해 버린 입양아로서 그녀는 기품 있는 자의 무너질 수 없는 성벽을, 불안정함은 발들일 수 없는 고요의 세계를, 다정하게 자신을 끌어안아 줄 어른을 간절히 꿈꿨으려나. 그녀만의 이상적 세계는 우아함으로 치장되어 있다. 부가 충만하고 여유가 뒤따르는 우아함의 세계. 그녀가 꿈꾸는 세계에는 사랑으로 채워져 있다. 오롯이 나에게만 향하는 따스하고 다정한 사랑의 세계. 상상만으로도 너저분한 삶이 지워지는 것만 같은 그런 아름다움이 깃든 이상의 세계.


매일 그려보는 이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달콤한데 현실의 그녀 모습은 너무나 비루하다. 이상의 나와 현실의 나 사이의 간극에 비참함을 느낀다. 그래서 그녀는 부자 남편이 꼭 필요하다. 나를 하루라도 빨리 이놈의 시들 거리는 인생으로부터 여왕의 삶으로 끌어올려 줄 남편이 곁에 있어야만 한다. 내가 이 밑바닥에서 저 위로 기어 올라갈 수 없으니 저 위에서 나를 끌어올려다 줄 남자가 필요하다.



인테리어


나와 내 공간을 꾸미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난 나를, 내 공간을 어떻게 채워 넣었나. 둘러보니 내가 동경하는 삶이 나와 집안 모든 것에 스며있다. 옷도, 물건도, 선반도, 그릇도, 심지어 책마저도 내가 산만해지지 않도록, 너무 들뜨지 않도록, 차분한 마음이 가득한 어른처럼 보이도록 꾸며져 있다. 여태 난 나의 모든 것들이 내가 살아오며 확립한 것, 내 개성, 내 본연의 것이 투영된 결과물이라 생각해 왔다. 그러나 오늘 이들이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를 생각하며 다시 주위를 둘러보니 이젠 그저 내가 꿈꾸기 위해, 내가 꿈꾸는 고요한 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세심히 설계된 것처럼 보인다. 내가 이상의 세계로 나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내 공간에서만이라도 이미 그리된 듯, 내 이상이 실현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라도 빠져보자 싶은 마음으로 지어진 공간이 보인다. 심지어 인간관계도. 내가 원하는 분위기를 위해 이 사람과 가까워지고 저 사람과는 멀어지길 반복한다. 내가 나 스스로 원하는 빛을 발할 수 없으니, 그들의 빛을 반사라도 시켜보자 하는 마음으로 누군가의 곁에 서고 누군가의 곁에서는 물러난다. 비인간적으로 보인들 어떠한가. 이렇게라도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게 기쁘기만 한 것을.


재스민은 자신을 언제나 우아하게 빛날 수 있게 해줄 부유한, 심지어 다정하기까지 한 남자와 안락한 가정을 꾸린다. 무너지지 않을 가치를 지닌 명품과 보석으로 치장한다. 자신의 소망을 잘 담아낼 집을 구축한다. 고상한 친구들을 완벽하게 꾸며진 자신의 삶 속으로 초대한다. 그 모든 것들과 어울린다. 이 모든 것이 그녀를 아름다움과 기품의 세계로 인도한다. 꾸며진 인생인들 어떠한가. 너무나 아름답기만 한 것을.


나의 이상과 닮은 모습으로 인테리어 된 나의 세계는 허황되고 실현될 가능성부터 따져봐야 할 꿈과는 다르다. 현실 위에 지어진, 이미 실현된 세계이다. 꿈꾸기를 넘어서 원하던 삶을 실제로 구현해 낸 것이다. 자포자기한 채로 눈앞의 꿈을 그리워만 하는 대신 원하는 삶을 새로운 현실 위에 창조한 것이다. 내 힘으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곳에 나의 것은 없었다


그래. 내가 꿈꾸는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그에 발맞춰 자기 자신이든, 주변 공간이든, 지인이든 갈아치울 수 있다.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만들어줄 누군가를 만나고 원하는 모습으로 치장할 수도, 원하는 삶을 투영한 공간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다만, 여기엔 지켜야 할 한 가지가 있다. 나에게서 너무 벗어나진 말 것. 나의 것을 남겨 놓을 것.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이상적인 인생을 실현하기 위해 인생을 인테리어 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잃지는 않는다. 내가 중심에 있고 나라는 중심으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먼저 조그만 가지를 뻗는다. 그리고 주위를 살피며 다치지 않게 조금씩 그 가지를 성장시킨다. 그게 보통의 사람이 이상의 세계에 발 들이기 위한 발버둥이다. 나아가는 과정에서 약간의 동요는 있을 수 있더라도 뿌리가 뽑힐 위험은 없다.


재스민의 세계는 다르다. 그녀가 인테리어한 세계 속에 그녀 본질은 어디에도 없다. 그곳엔 그녀의 바람만 있을 뿐, 그녀의 것은 없다. 본연의 자신마저 없다. 구질구질한 자아는 버려 버린 지 오래고 새로이 만들어진 세계에 어울릴 우아한 자아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꼴 보기 싫은 헌것 대신 아름다운 새것으로 자아를 갈아 끼웠다. 그녀의 것은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 남의 것으로 충만한 세계에 그녀의 것도, 그녀도 없다.


그녀가 만들어낸 세계가 부서질 수밖에 없는 기미는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내 것이라곤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계는 본래 주인의 힘에 의해 쉽게 무너져 내린다. 이 모든 것들의 실제 주인, 부유한 남편이 그녀로부터 등 돌린다면 그녀와 그녀의 세계는 한순간에 사라지게 된다. 단단하게 디딜 땅도, 그 땅 깊숙이 내릴 뿌리도 없는 그녀는 모든 걸 잃고 흔들린다. 꿈을 실현해 줄 또 다른 부유한 이를 만나더라도 언제고 또다시 무너질 수밖에 없다.



내 것이 아닌 것을 탐내다


지금의 내 세계를 다시 둘러본다. 내 몸에, 내 마음에, 내 주변에 내 것 아닌 것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해 본다. 내 삶이 이상만 좇다 기형적으로 뒤틀려 버리진 않았는지, 나라는 본질을 놓쳐 버리진 않았는지 살펴본다. 남의 것으로 나의 세계, 내 인생을 꾸렸나. 내 것이 아닌 것을 탐내었나.


나다운 것은 나를 편안하게 한다. 내 것으로 채운 세계는 나를 닮아있다. 나답기에 편안하다. 내가 세계에 맞춰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 세계가 이미 나에게 꼭 맞춰져 있기에 불편함도, 불안함도 없다. 가만히 의식을 놓고 있더라도 평소 보는 그대로의 나이기에 이상할 게 없다. 언제든 맘 놓고 방심한 상태로 있어도 된다. 내 것으로 만든 세계는 이렇듯 마음이 편안하다. 이곳에선 조바심이 나지 않는다. 이미 나와 가장 가까운 모습으로 존재하는 곳이기에 이 세상과 닮기 위해 종종걸음치며 부지런히 나아갈 노력은 할 필요가 없다.


재스민의 이상은 본연의 그녀를 닮지 않았다. 예민하고 불안정한 본연의 모습에선 우아함의 기본 요소인 여유로움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본질과는 정반대를 계속해서 탐낸다. 저 반대편에 존재하는 여유로움이 충만한 우아함의 세계를 탐낸다. 재스민은 그녀 것이 아닌 것으로 기어이 탐내던 것을 쟁취하고야 만다. 그리고 그녀의 꿈을 실현해 준 이를 부재 상태에 빠뜨림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무너뜨렸다. 그녀는 이상의 세계 밖으로 내쫓긴 후에도 우아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러나 자신을 닮지 않은 우아한 자신의 모습이 불편한지, 예민하고 불안정한 본연의 모습이 조금씩 새어 나올 기회를 엿본다. 원하는 우아함을 지키기 위해선 방심할 수 없다. 원하는 삶을 지키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운다. 남의 것으로 이뤘던 세계를 떠올린다. 그 세계에 맞춰 그녀 자신을 꼭 맞춘다. 불안정하다. 그렇게 그녀는 망가져 간다.


내게 다시 묻는다. 지금 난 내 세계 안에서 불편함을 느끼진 않는가. 난 나의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진 않은가. 내 현재 삶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남의 것을 탐내었나. 맞지 않는 이상을 그리다 망가져 버리진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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