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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May 19. 2024

당신들로 채우다

데이빗 휴 존스 감독의 84번가의 연인(1987)

뉴욕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책을 얻을 수 없었던 작가 헬렌은 어느 날 런던의 한 서점을 알게 된다. 그녀는 그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책 리스트를 편지에 담아 전한다. 원하는 책을 얻기 위해, 누군가가 원한다는 책을 전하기 위해 시작된 이들의 편지는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다. 글이 오고 가고, 책이 오고 간다. 그리고 그들의 우정도 오고 간다.



글을 통해 당신과 나누는 대화


서서히 커지는 바람이 있다. 누군가에게 글을 쓰는 것, 그리고 그 글을 전하는 것. 거창한 뭔가를 담아낸다거나 특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 아닌 그저 사소한 일상을 전하는 글을 쓰는 것. 그리고 이를 다수가 아닌 특별한 누군가에게 전하는 것. 편지를 쓰고 싶다. 어릴 적엔 친구들과 종종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이젠 까마득한 옛일이 되어버렸다. 카톡 한 줄은 그렇게나 쓰기 귀찮아하면서 종이 한 장을 가득 채워야 하는 편지는 왜 그리도 쓰고 싶어지는지.


나이를 먹을수록 종이 한 장 그득히 진심을 담아내고 싶어진다.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는 나만의 시간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조용한 나만의 공간 안에서 내 인생에 하나의 흔적으로 남은 이에게 나의 말을 전한다. 내 진심을 나의 고유한 언어를 통해, 오랜 세월 다듬어온 나의 필체를 통해 빈 종이 위에 노출하고 싶어진다. 말은 금세 사라진다. 카톡이나 메일은 진심이 금세 휘발되어 버린다. 그래서 사라지지 않도록, 오히려 세월에 따라 깊어질 수 있도록 편지로 마음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


편지는 전할 때도 받을 때도 설렌다. 마음을 전하는 데 몇 분, 몇 시간, 혹은 며칠이 걸릴 수도 있다.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들여서 그렇게 전해진다. 시간에 따라 묵혀진 마음은 그 농도가 짙다. 가벼운 한 줄도 약간의 시간을 들이면 맛이 한층 성숙해진다. 편지에는 그런 맛이 있다. 절대 간단치 않은 그런 농후한 맛이 편지에 깃든다.



당신들이 채워주는 책장


사람이 싫다고 떠벌리고 다니긴 하지만 사람들이 채워주는 것들은 좋아한다. 홀로 겪는 시간과 사건은 나답다. 나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저 나같이 생겼다. 가던 방향 그대로, 생긴 모양 그대로 깊이만 살짝 더 깊어진, 너비만 조금 더 넓어진 모양새이다. 반면 그들과 함께한 시간과 사건에는 내 것에 그들다움이 곁들여진다. 그들이 저마다 가지고 온 것들에 의해 어그러지고 깊이 할퀴어진다. 그 위에는 내가 싫어하는 색으로도, 내가 난생 처음보는 색으로도 덧칠해진다. 그들로 인해 내가 모르는 모양으로 일그러진다. 그들로 인해 나는 달라지고 그로 인해 한층 더 풍부해진다.


책을 산다. 온라인 서점을 통해서 혹은 오프라인 서점에 직접 방문해서 책을 산다. 그 책을 읽는다. 그리고 책장에 새로이 얻게 된 그 책을 꽂는다. 타인의 개입 없이 순수히 나의 의지로 작동하는 이 프로세스에서 나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내가 알고 싶어하던 것을 알게 될 수 있고 얻고 싶었던 경험, 감정을 얻어낼 수 있다.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을 내 책장, 내 공간에 채워 넣을 수 있다. 이대로도 좋다. 나의 필요는 충족되고, 난 그 결과에 난 만족한다.


이제는 동일한 과정에 나 아닌 다른 이들을 추가해 보자. 내가 원하는 것을 그들에게 전한다. 그들은 내가 간절히 얻고 싶어 하는 책을 찾은 후 내게 전한다. 겉으로 보면 굉장히 단순한 이 책 구매 과정에는 사실 로맨틱한 부분이 심겨 있다. 사람들, 당신들이 이 단조로운 과정을 얼마나 복잡하게 만들 수 있는지, 아름답게, 애절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알고 있으려나. 당신들은 내가 나도 모르게 책 리스트 속에 함께 흘려 넣은 마음 한 조각을 알아채고, 그 한 조각의 마음에 대한 반응을 책과 함께 나에게로 보낸다. 당신들이 내게 보내온 응답은 단순한 충족, 만족을 넘어서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처음의 난 당신들에게 책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제 난 당신들이 힘든 시기 속에서도 늘 안녕하길 요구한다. 당신들이 이렇게 오래도록 나와 마음으로 이어지길 요구한다. 당신들이 영원히 살아남아 나의 기억에 새겨지길, 추억으로 남아주길 요구한다.



세월이 남긴 잔상


시간이라는 요소는 많은 것들에 애절함을 더한다. 돌아갈 수 없는 길에 남겨두고 온 모든 것들이 내 기억 속에 아련하고 애틋하게 자리할 수 있도록 한다. 그 소중했던 시절에 이뤄진 모든 것들에 아름다움이 더해지도록 한다. 시간은 가혹하게도 아리고 먹먹한, 소중한 나의 옛 시절로 또 한 번 돌아갈 기회 따윈 주지 않는다. 그래서 현재의 내가 그날의 나를 떠올릴 때면 늘 심장 한 켠을 긁어대는 것만 같은 아픔을 맞닥뜨리게 된다.


세월에 따라 나는 서서히 늙어간다. 세월에 따라 그날, 그 순간에 함께 했던 것들도 나와 함께 서서히 낡아간다. 그 당시의 완전한 형태는 죽는 날까지 다시는 만날 수 없도록 시간은 그때의 기억을 조금씩 훼손한다. 내가 그때의 따스하고 포근했던 기억 안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도록 시간은 그날의 추억을 날카롭게 조각내버린다. 그러나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마주하여 이제는 닳아지고, 희미해지고, 모나지고, 날카롭게 벼려진 지난날의 잔상은 옛 모습을 잃어감에 따라 오히려 더욱 강렬해지고 더욱 깊어진다. 이제는 깊숙한 감상에 젖어 들게 만드는 그런 형태가 되어버렸다.


당신들과 주고받은 그 모든 것들, 그것들이 내게 남긴 흔적은 내가 떠올릴 때마다 심연 아래 빠져들게 한다. 지금, 이 현실 위에 놓인 내가 잠깐이나마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웅덩이에 빠져들게 한다. 세월에 따라 늙어온 내가 예전의 당신들을 떠올리며, 당신들이 내게 남긴 책, 마음, 그 모든 잔상을 다시금 그려보며 감정의 늪에 어제도, 그제도 도달하지 못한 깊이로 빠져들게 한다.



만나기 딱 알맞은 시간, 알맞은 만남의 형태


누군가를 만나기 딱 알맞은 시간이 있다. 그리고 누군가를 만나기 딱 알맞은 만남의 형태가 있다. 딱 지금이어야만, 딱 지금처럼 편지를 통해야만 당신들을 향한 애틋함을 느낄 수 있다. 그래야만 당신들을 향한 절절한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비록 이제는 당신들을 끝끝내 현실에서 마주하지 못하더라도, 오랜 시간 늘 고마웠던 당신들을 이제는 영영 만날 수 없게 되더라도 아쉬워하지 말자. 우리가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기에 서로가 더 소중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고 우리가 말을 직접 맞대지 못했기에 당신이 전한 글을 한 자 한 자 곱씹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우리에게 있어서만큼은 그 시절에 주고받았던 편지가, 책들이 그 어떤 만남의 순간과 만남의 방식보다도 가장 적절한 때였고 가장 적절한 형태였다. 오늘의 내게 가장 깊은 감상을 새길 수 있었던 딱 알맞은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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