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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Jun 09. 2024

당신을 잃어버렸을 때

조앤 디디온의 상실


가족의 말이 슬픔의 이유가 된다


어느 날 제부가 말했다. 우리 가족은 모두 엄마의 말을 닮았다고. 사실 그의 말은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렸다. 우린 엄마의 말만 닮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도, 둘째의 말도, 셋째의 말도, 그리고 나의 말도 닮았다. 우리는 서로가 쓰는 말을 서로가 사용한다. 닮은 얼굴로 닮은 언어를 쓴다. 우리가 함께 맞대고 있는 닮음의 세계 안에서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서로에게 동화된다. 우리만의 말이 늘어날수록 우린 더욱 가족이 되어간다.


가족 언어를 무의식적으로 쓸 때가 많지만, 어떤 날에는 의식적으로 쓰기도 한다. 너무 좋아해서 좀 더 확실히 이어졌으면 하는 욕심이 일 때 그들의 말로 그들에게 말을 건넨다. 가족들이 유난히 사랑스럽다고 느껴질 때마다 난 아버지의 말, 어머니의 말, 둘째의 말, 막내의 말을 쓴다. 그들의 말로 가족만의 방을 만든다. 맘 놓고 사랑스러움을 발산할 수 있도록 그들을 가족의 방으로 초대한다. 이 편안하고 즐거운 공간 안에서 우린 가장 우리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무장해제 상태로, 서로 마주 보며, 서로의 말을 쓰며, 서로 웃고 행복해한다. 나만 알 수 있는 가족의 무방비한 모습, 그 사랑스러운 모습은 항상 나에게 열려있다. 어느 순간에도 내가 완전히 받아들여질 것만 같은 편안한 기분은 이렇듯 가족의 언어 아래에서 생겨난다.


'하루 더 사는 것보다 더'는 하루 더 사는 것보다 더 당신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저자 조앤의 가족 울타리 내에서 통용되는 말이다. 이들 가족 또한 가족 암호가 있다. 이들 또한 자기네들만의 암호로 즐거운 순간에선 즐거움을 키우고 사랑을 주고픈 순간엔 전하는 사랑의 마음을 키운다. 가족의 언어가 늘어날수록 그들만의 세계는 깊어진다. 깊어진 세계만큼 그들은 더욱 닮아가며, 더욱 서로에게 익숙해지며, 더욱 편안함을 느낀다. 견고하고 안정된 가족의 세계 안에서 자유롭게 사랑스러워진 서로를 느낀다.


편안함의 세계, 내가 언제고 받아들여질 수 있을 거라 기대한 그 안전한 세계는 우리가 함께 이룩했던 언어의 세계가 무너질 때 함께 무너진다. 한 해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무렵 저자의 남편 존은 세상과 결별한다. 딸 퀸타나는 폐렴 합병증으로 죽음의 기로에 서 있다. 많은 것을 공유했던 이들의 부재. 늘 함께 해온 평범한 일상을 더 이상 공유할 수 없게 된다는 건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부재로부터 오는 가장 큰 슬픔은 따로 있다. 이젠 우리가 함께했던 말이 빈 공간을 떠나 공허함 속을 맴돌더니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 채 그대로 나의 귀에 되돌아온다는 것. 우리만 알던 언어가 이제는 쓸모없어졌다는 것. 이젠 나를 편안하게 할 공간이 사라졌다. 내가 완전히 받아들여질 열린 공간이 사라졌다.



알고자 하는 이유


죽음은 끝이 아니다. 죽음은 남은 이에게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연다. 평범했던 지난날들은 떠난 이와 함께 사라져 버리고 남은 이 앞엔 텅 빈 새로운 세계 하나가 열린다. 이 비어있는 세계는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의지를 지우고 하나의 의지를 남긴다. 그를 떠나보내지 않겠단 의지, 그를 기억 속에서나마 영원히 붙잡으려는 의지.


조앤은 존의 죽음에 대해 알고자 한다. 그의 심장이 멎은 정확한 시각을 알고자 한다. 그의 심장이 어떻게 꺼져갔는지, 그의 눈동자는 죽음 앞에서 어떤 형태를 띠었는지 알고자 한다. 그가 죽음에 이르기 전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떠올린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되짚어가며 혹여나 그의 죽음이 그녀에게 미리 보내온 메시지는 없었는지 살핀다. 텅 비어버린 그녀의 세계가 그와 함께 한 모든 순간으로 가득해진다. 채워진 공간을 둘러보니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 속삭이는 듯하다. 바로 내가 그를 죽음으로 인도했으며, 나는 너에게 미리 나의 존재를 내비쳤다고. 근데 너는 나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네 갈 길만 가더라고. 그래서 네가 그를 구하지 못했고, 그래서 네가 지금처럼 상실감과 무력감에 젖어있는 거라고.


지식은 가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을 거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지식이 미리 쌓여 있었더라면, 내가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이를 이용해서 상황을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내 의도대로 통제할 수 있었을 텐데. 당신의 행동과 당신의 말이 내게 던지는 진짜 의미를 알았더라면, 당신의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살폈더라면 당신의 죽음을 통제할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무력하게 당신을 떠나보내지 않았을 텐데. 조앤은 존의 죽음으로 죄책감을 느낀다. 그의 죽음은 그녀가 통제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음에도 자신의 무지와 무관심이 그를 영영 떠나가게 했다 생각하며 죄책감에 빠져든다.



파도는 피할 수 없다


상실의 과정은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부재가 만든 빈 세계는 모든 의지를 지우고 하나의 의지를 남긴다. 그를 잃었단 사실을 떠올리지 않겠단 의지, 그리하여 그의 상실로 인한 아픔으로부터 도망치겠단 의지.


남은 이가 상실 속에서 여유를 잃게 되는 건 아마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나는 이미 발생한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며 스스로를 달래려 할 때, 혹은 그의 죽음을 상상으로나마 막아보려 이젠 무의미해진 노력을 할 때. 다른 하나는 아픔이 찾아오지 못하도록 슬픔을 떠올리게 할 모든 것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할 때, 또는 슬픔이 주는 아픔에서 벗어나고자 아무것에나 집중하고 아무것이나 행함으로써 여유의 순간이 찾아오지 못하게 막으려 할 때.


조앤은 존의 죽음, 그의 상실로 인해 잔혹한 저주에 걸린다. 이제 그녀는 상실의 아픔에서 벗어나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고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통제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그와의 모든 것과 그의 죽음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여유는 사라진다. 일상도 사라진다. 상실 속에서 바쁘게 상실에만 몰두해야 하는 저주가 그녀를 덮친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슬픔을 막아낼 수 없다. 여유를 반납했음에도 그녀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상실의 저주에 걸렸기 때문에.


조앤은 퀸타나의 부재를 코 앞에 둔 채, 상실의 저주에 빠져 허우적댄다. 딸아이와의 추억이 담긴 그 모든 것들에서부터 벗어나려 노력한다. 그러나 퀸타나를 연상케 하는 무언가를 피하지 못하고 결국 맞닥뜨리게 된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슬픔에 갇힌다. 어떤 노력으로도 이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상실의 저주에 빠졌기 때문에.


슬픔이 막연할 때면 우린 이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슬픔이 닥치면 피할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파도는 밀려온다. 내가 제아무리 팔을 넓게 뻗어 막으려 해도 그 거대한 규모의 파도는 도저히 막아낼 수 없다. 그저 묵묵히 맞이할 수밖에. 조앤은 무던히 노력했다. 상실을 이겨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길 수 없다. 파도는 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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