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1998)
토드, 시작되다
토드는 우월의식에 젖어있다. 그는 우리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도 정말 우월하다. 성적도 좋고, 운동도 잘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은 듯하고, 집안도 좋아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있어 타인의 가치는 자신보다 더 낮게 평가된다. 이 사실은 뒤산더를 만나고부터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토드에게 뒤산더는 자신보다 아래에 놓인다. 그는 뒤산더의 약점을 쥐고 마구 흔든다. 이는 뒤산더를 넘어 자신의 친구, 비둘기, 더 나아가 진로상담 선생에게까지 번진다.
‘그 누구보다 우월한 나이기에 보다 열등한 것들은 그저 나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그들은 나의 지시를 거역하거나 나에게 역으로 지시를 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나는 우월하기에 강한 정신력도 가지고 있다. 나치의 잔혹함을 들어도 충격은커녕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 끔찍한 이야기는 강인하고 우월한 나에겐 그저 호기심을 채우는 도구에 불과하다.’
계속 보다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는 너무나 오만한 생각이다. 토드가 기대한 것과는 달리 뒤산더의 말에 쉽게 흔들리고 그가 주는 강한 자극에 충격을 받는다. 우월하고 강한 줄 알았던 자신이 사실은 나약하단 사실에 괴롭고, 그런 나약함이 숨겨지지 못하고 조금씩 밖으로 새어 나가고 있는 것만 같아 또 괴롭다. 그 괴로움을 달래고자, 이 괴로운 감정을 다스리고자 그는 과격해진다. 젠틀함과 여유는 사라지고 잔인함과 폭력성이 남는다. 자신의 약함을 외부로, 그리고 자신 내부에서도 숨기기 위해 잔인함이 표출된다. 어쩌면 그의 잔인함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외로운 섬 하나
“솔직함은 애들에게 주어진 특권이잖아요. 어른이 되면 마냥 솔직할 수는 없죠.”
“인간은 섬이 아니다.”
뒤산더는 단절된 삶을 산다. 지난날의 잘못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본래의 모습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그러던 어느 날 토드가 찾아온다. 처음엔 단순히 몇 가지 정보만으로 그를 옥죄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뒤산더 본인의 입으로 그가 저지른 만행을 낱낱이 고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감춰뒀던 그 날의 기억을 더듬어 말로 드러낸다. 그는 점점 자신의 말에 취하고 그날의 기억에 젖어 들어간다. 그날의 자신으로 돌아간다.
내가 감추고 싶은 것을 억지로 들춰내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며 이는 나를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뒤산더의 경우 불편해하기보단 되려 속 시원해 보인다. 자신이 했던 일은 과거엔 옳은 행동이었으나 바뀌어 버린 세상에선 옳지 못한 행동이 되었다. 과거엔 그 행동에 당당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비난당할 뿐만 아니라 죗값을 치르라 한다. 그래서 감추었던 것인데 토드가 억지로 끄집어낸다. 대신 토드는 그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는다. 되려 흥미로워한다. 뒤산더 입장에선 자신의 지난 과오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주는 토드가 반갑다. 그래서 모순적이게도 자신을 위협하는 이 청년이 심적으로는 의지가 된다. 오랜 시간 자신의 비밀로 폐쇄적인 삶을 살아왔던, 외로웠던 자신을 토드가 위로해준 셈이다.
사람과 악인 사이
뒤산더는 본래 잔인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지키려 숨기고 있었으나 토드로 인해 발현된 본래의 자아가 고양이 학대 장면을 통해 비춰진다. 그리고 마치 지난날의 자신을 그리워하는 듯 토드가 건네준 나치 군복을 꺼내 입는다.
비록 그는 악인이지만 그래도 사람이기에 외로움을 느끼고 사람과 연결되길 원한다. 뒤산더는 토드와 인간적인 관계를 맺길 원한다. 그러나 이 청년은 결국 그를 원망한다. 그래서 그를 죽이고 싶어 한다. 그는 이를 알면서도 토드를 쉽게 놓지 못한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한다. 인간은 섬이 아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뒤산더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악이 밑바탕이 돼 있으나 그 위에 인간적인 면모도 조금 올려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토드는 그런 뒤산더와는 시작이 다르다. 토드는 자신의 집안사람들과는 달리 사냥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잘 들여다보면 토드의 도덕적인 측면과 여린 심성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뒤산더의 고문 이야기에 그리 큰 영향을 받은 것만 봐도 도덕적 기준이 있고 공감 능력도 있는 아이이다. 그런 그가 악인인 뒤산더에게 끌린 이유는 어쩌면 악이 주는 강렬함이, 강해 보이는 이미지가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일 수 있다. 아니면 정석에 가깝던 자신의 인생이 지루해진 나머지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고 그와 반대되는 특성인 악이 곧 자신이라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앞서 말한 것처럼 토드의 본래 기질은 다른 생명을 괴롭히는 걸 즐기지 않는다.
토드는 잔혹함을 즐기는 유형이 아니다. 그보단 자신을 지키려는 성향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다.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자신이 우위에 있어야 하고 자신이 통제의 주체가 되어야 하며, 자신이 더 강해야 한다. 자신이 위협받는 것은 곧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그런 그에게 극도의 불안이 덮치게 된다. 결국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잔인해진다. 벼랑 끝에 내몰리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유대인들이 가스 고문을 당할 때 어린아이를 먼저 살려야 한다는 기존의 관념이 아닌 그 힘없는 아이들을 밟고 자신이 살고자 했단 뒤산더의 말을 다시 떠올려보자. 그런 행동을 한 유대인을 악인이라 손가락질할 수 있는가. 그 상황에서, 이미 가스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에서, 극도의 불안에 내몰려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된 상태에서 기존의 도덕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다. 갈수록 토드는 심리적으로 내몰린다. 자신의 기대완 달리 자기 자신을 지키기 어려울 수도 있단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고 뒤산더와의 관계가 꼬리표가 되어 평생을 따라다닐 수 있단 사실이 그를 불안케 한다. 그 불안감은 도덕성을 잠재우고 그 위에 생존을 위한 비도덕적인 행동을 띄운다.
잔인함에 대한 호기심에, 잔인해져도 된다는 당위성이 부여된다. 그리고 여기에 그 잔혹함의 표출 방식에 대한 교육이 더해져 이카로스의 날개가 완성된다.
“이 조그만 장애물만 넘으면 네 세상이 펼쳐질 거야.”
진로상담 선생의 말처럼 어떤 이유에서건 토드는 조그만 장애물을 넘었다. 당위성과 악에 대한 교육이 도덕성이라는 장애물을 넘어서게 했다. 아마 갈수록 토드는 무뎌질 것이다. 양심도 무뎌질 것이고 감정도 무뎌질 것이다. 시작은 달랐지만, 점점 악에 물들어 갈 것이다. 그는 사람으로서의 면모를 내려놓고 진짜 악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