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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Aug 18. 2024

안나 카레니나

조 라이트 감독의 안나 카레니나(2012)



무대 위에서


이 작품은 다양한 부분에서 재미를 주었는데, 특히 ‘공간’이 가장 재밌었다. 무대를 가져와 현실과 무대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것, 공간의 이동이 눈에 보이는 것은 신선한 경험이다. 이러한 공간 이동의 목격은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는 이음새를 매끄럽게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매끄럽게 이어지는 모든 것이 서로 다른 게 아니라 하나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연결성, 무대라는 장치는 극 중 모든 것을 다 연결 짓는다.


무대는 극적인 것을 더 극적이게 한다. 실제 무대라는 공간에서 행해지는 많은 작품은 상당히 눈에 띈다. 그 위에서 이뤄지는 움직임은 작고 미세하기보다는 크고 화려하다. 감정선도 큰 폭으로 너울진다. 그 덕분에 먼 곳에 앉은 이도 무대 위에서 이뤄지는 일련의 사건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무대는 그런 극적인 작품들이 떠오르게 하고, 그 극적인 작품이 우리가 이 작품을 받아들일 감정, 자세의 토대를 형성한다. ‘크게 요동칠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미리 조심하지 않으면 그 반동으로 인해 튕겨 나갈 수 있습니다.’



크기의 영향력


작은 힘의 영향이 클까, 큰 힘이 미치는 영향이 더 클까? 영화와 같은 매체에서, 물론 다른 영향력도 함께 고려해야겠지만 관객의 정신을 흔들어 놓는 힘의 크기만 놓고 본다면 오히려 작은 힘의 영향이 더 크지 않나 싶다. 작게 미는 힘은 쉽게 스며든다. 힘이 작용했는지 인식하지 못했기에 저도 모르게 밀린다. 반대로 큰 힘으로 미는 힘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에 딱 버티고 서게 만든다.


앞서 무대가 극적인 것을 더 극적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말했다. 극적인 것, 큰 힘이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륜이 그렇다. 그러나 그 이면에 깔린 그들을 향한 부정적인 감정은 이들의 사랑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게 움직인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움직임, 사랑의 행위는 큰 반면, 이들을 향한 주변의 부정적 시선은 작게 움직인다. 또한 이들을 담고 있는 테두리, 장면과 음향 등의 연출 또한 이들의 움직임에 비해서는 작다. 즉, 무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극적인 것들은 거부하게 하고, 크진 않지만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들은 은연중에 받아들이게 한다.



죄인의 고통


욕정, 본능으로만 구성된 사랑은 또 다른 세계를 만든다. 그 세계 안의 주인공은 둘 뿐인데, 이들 밖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다른 것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주변의 시선, 도덕적 잣대, 주변에 줄 수도 있는 상처와 같은 것들 말이다. 그저 두 사람 사이에는 화려하고 자극적인 즐거움만이 채워진다. 굉장히 이기적인 상태가 된다. 자잘한 이유, 변명 따윈 내려놓고 오로지 마음에만 충실한 사랑은 어떤 각도에서는 아름답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브론스키에게 사랑받던 프루프루(경주마)가 브론스키에 의해 죽임을 당하듯 쓸모가 다하면 욕구의 끝과 함께 사랑도 종말을 맞는다. 이들의 관계는 강렬하게 맺어졌으나 끊어짐 또한 강렬하다. 누렸던 기쁨보다 더 큰 상처를 받게 된다.


이렇듯 가만히 두어도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결국 파멸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주변 이들을 통해 이들을 더욱 흔들어 놓는다. 만약 두 사람에게만 집중한 나머지 이들 사랑의 파멸로만 영화를 끝맺었다면 단순히 욕정의 사랑은 얼마 못 간다 정도의 경각심만 남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사랑의 참 의미를 가르치려면 욕정의 사랑에 대한 문제 제기, 그에 따른 죄의식과 그로 인한 고통, 진짜 사랑의 형태 이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죄인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죄인이 한껏 느낄 죄의식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사회, 주변의 시선이 필요하다. 우린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사람과 사람으로 이루어진 이 사회 안에서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그리고 그 사회 안에서 우린 우리가 지은 죄를 사회적 눈치에 의해 알게 된다. 나의 죄는 내 내면의 기준에 의해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외부의 눈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게 더 많기 때문에.


사랑에 빠진 이들이 만들었던 둘만의 세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그들 사이의 열기가 조금씩 식어갈수록 현실과는 점점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제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그간 둘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서로의 눈을 가린 채 세상으로부터 숨었다 착각했던 것이다. 현실의 눈이 떠진 안나는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게 된다. 주변이 자신과는 너무나 달리 움직인다. 앞서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진 나날처럼 주변이 달리 움직인다. 그러나 그때완 어딘가 다르다. 이전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연속이었고 둘 뿐이었음에도 공간 안을 가득 채운 벅찬 감정이 있었다면 지금은 냉기만 남았다. 모든 것이 기괴하게 움직이고 자신과 어울어지지 못한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을 걷는 것 마냥 동떨어진 세계에 놓인다. 안나는 외로움을 넘어서 괴로움을 안게 된다. 결국 안나는 기차의 그 육중한 무게로 삶의 짐, 고통을 단칼에 끊어낸다.



그럼에도 사랑


사랑에 눈먼 이들이 아무 죄도 없는 자신을 난도질 했음에도 이들을 용서하는 관대하고도 관대한 알렉세이의 사랑도, 오로지 키티에게로만 향하는 레빈의 순수하고 지고지순한 사랑도, 사랑하는 이를 위해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는 키티의 사랑도 모두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과 대조적이다. 그러한 대조는 욕정으로 작동되는 이들의 사랑을 더욱 타락하고 죄스럽게 만든다.


알렉세이와 레빈, 키티의 모습은 그저 욕정 가득한 사랑을 비난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더 우위의 사랑, 사랑하는 자의 진정한 태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분노를 삭이고 받아들여 주는 사랑도 사랑이고 이성적이지만 알게 모르게 본능과 감정이 섞여 들어간 사랑도 사랑이다. 비록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를 위해 온 마음을 다하는 사랑도 사랑이다. 그런 상위의 사랑을 이들 세 사람이 가르쳐준다. 욕정 가득한 사랑이 자연이 준 본능에 가깝기에 순수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린 사회를 살아가기에 옆 사람을 신경 써야 한다. 옆 사람을 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들의 고뇌와 절제, 후회가 담긴 사랑이 진짜 순수한 사랑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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