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책방과 독립서점
여러 도시를 다니며 문화도시, 문화재생에 대한 도움을 주면서 브런치에서 열 번의 글쓰기를 하던 중에 저의 신변에 중요한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제가 가진 경험을 고향인 제주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에 도전하였고 낙점을 받아 이사장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나름 많은 경험을 했다고 자부하지만 제주에서 문화예술에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재단의 이사장은 제가 경험하지 못한 여러 일들이 있는 곳이기에 저의 장점은 잘 살리되 여러 전문가들께 좋은 말씀을 들으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일기처럼 오늘을 반성하고 내일을 그려나가려고 제주의 문화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하려고 합니다. 제주를 통해 대한민국과 지구의 문화예술 이야기를 같이 나누면 좋겠습니다.
문화와 도시 1 _ 책으로 만드는 마을
작은 책방과 독립서점
오늘(2020년 9월 20일 일요일)은 제주에 보물 같은 날이었습니다. 지긋지긋했던 장마가 끝나고 이제 여름이 시작되나 싶을 정도로 화창하고 뜨거운 햇살로 인해 하늘이 반짝반짝거렸습니다. 하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반짝이는 파도도 있었고 지나가는 비행기도 반짝거립니다. 제주의 상징인 한라산도 아름다운 능선을 모두 보여주는 황홀한 날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집을 나서 발길을 향한 곳은 제주에서도 아름다운 곳으로 잘 알려진 애월입니다. 바닷가 카페에 앉아 바다도 보고 바다 건너 도시 풍경도 바라보고(바다 건너 육지인 전라도, 다도해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애월 그 지역은 만처럼 바다가 육지로 들어와 있는 곳이어서 바다 건너 마을이 보이는 곳입니다) 친구와 수다도 떨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친구가 운영하는 서점으로 향했습니다.
친구의 서점은 꽃가게를 같이 하는 독특한 곳으로 책 냄새와 꽃향기를 동시에 맡을 수 있는 매력적인 곳입니다. 성난 바다나 깊은 하늘에서 볼 수 있는 색으로 건물을 칠해서 더욱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 서점이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는 책을 이백권 정도만 갖다 놓는데 보고 싶은 책들만 갖다 놓기 때문에 들를 때마다 서너 권 이상 사게 되는 곳입니다. 이번에는 미리 부탁드린 작가님의 책과 함께 제주를 주제로 글 쓰기를 하는 작가님의 책 만들기 강좌도 열리고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다 보니 무려 일곱 권을 사게 됐습니다. 한동안 배가 부를 듯합니다.
책을 사면서 우연히 도서정가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됐습니다. 평상시 온라인에서도 구매하고 대형서점이나 독립서점 등 들르는 곳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사는 스타일이라 도서정가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지 않았는데 실제 작은 책방, 독립 책방을 운영하는 관점에서 도서정가제의 의미를 듣게 되어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 도서정가제가 폐지되면 온라인이나 대형서점에서 싼 가격에 책을 살 수 있으니 좋은 게 아니냐는 이야기를 평상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을 하기 전부터 문화예술은 대도시, 사람 많은 곳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 속에 들어와야 하고 마을마다 동네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문화예술을 즐기고 직접 활동을 하면서 자신을 찾고 치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 역할을 하는 다양한 공간들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 또한 그런 마음으로 작은 도시에서 조그마한 갤러리도 운영하고,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책을 많이 가져다 놓지 않지만 적은 수의 책을 팔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작은 책방, 독립출판이나 1인 출판을 하는 소규모로 출판되는 책을 다루는 독립서점은 동네마다의 문화예술 거점이 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주는 작은 책방, 독립 서점들이 많이 모여 있고 저마다의 특색을 가지고 있어 제주의 문화예술에 많은 콘텐츠를 제공하고, 많은 이야기를 만들고 있어 공공재로 보아도 충분합니다. 행정이나 문화예술 관련 기관들이 큰 계획을 세우고 다양한 문화예술 지원을 하고 있지만 현장의 활동이 없다면 무용지물입니다. 하지만 책방들은 자신만의 철학을 바탕으로 때로는 자기 돈으로 때로는 약간의 지원금을 받으면서 다양한 활동을 해주고 있으니 지역의 문화예술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도서정가제가 폐지되면 이런 곳들이 많이 힘들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소비자 입장에서 책 가격이 떨어지면 책을 많이 사게 되고 책을 많이 사게 될 수도 있으니 좋을 수도 있겠지만 책시장 전체의 생태계로 볼 때 동네책방들이 사라지고 대형서점, 온라인 서점만 남게 되어 동네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여러 즐거움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어린 시절 만화가 가득한 월간 잡지를 사기 위해 동네 책방에 뛰어가고, 도서관만큼 책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보면서 꿈을 꾸던 추억을 우리 자녀들은 경험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대도시에서는 작은 서점들이 사라져 가고 있고 그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지역문화에 기반한 강좌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지역 문화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제주에서도 최근의 독서대전이나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책 축제도 있지만 제주도 전체에 펼쳐진 작은 책방들이 전시회도 하고 강좌도 하고 특히 손님들과 친근한 대화를 통해 우리 공동체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그 중요성을 인식한 서귀포시와 제주시에서 문화도시 프로젝트 안에 책방을 묶는 프로그램을 진행할 정도입니다. 서귀포시는 책방 데이, 제주시는 책섬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제주문화예술재단에서는 두 문화도시에서 진행되는 책 프로젝트를 제주도 전체로 묶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는 도서정가제가 폐지되는 것이 좋을 수도 있고, 도서정가제가 그대로 남기를 바라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쪽을 지지하는가는 개인의 판단이지만 공공의 관점에서 본다면 책시장의 생태계가 유지되고, 책이 단순 소비재가 아닌 책이 만들어내는 문화콘텐츠로서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책은 공공재로 접근해야 하고 도서정가제는 유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도서정가제가 폐지된다면 책이 오로지 가격 경쟁으로만 평가되어 공공성을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요? 오히려 정책적으로 작은 책방, 독립 책방을 지원해서 1인 출판이나 독립출판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이 책방에서 이루어지도록 하여 우리 동네 우리 마을을 문화적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책방이라는 곳은 단순히 책만 사고파는 곳이 아닙니다. 문화와 예술을 파는 곳입니다. 아름다운 전시나 콘서트를 보기 위해 돈을 내는 것처럼 책방에서는 책이라는 티켓을 사고 아름다운 문화예술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작은 책방, 독립서점을 지키는 일이며, 우리 문화예술을 지키는 일입니다. 오늘은 도서정가제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하는 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