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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에게 라면과 김밥이란?

오늘은 내가 나폴레옹이다 (16)

by Kevin Kim

2024년 5월 4일 토요일 (15일 차)

신비로운 마을 까스트로헤리스




다시 새로운 아침이 되었다. 이제 메세타 고원을 본격적으로 걷게 될 것을 기대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부터는 일교차도 더 크고, 비바람은 보다 혹독할 것이며,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면 피할 방법이 없는 고원 평야가 계속될 것이다. 그러기에 더욱 힘을 내야지. 그래 "도전!" 외치고 출발한다.


평원이다 보니 앞서가는 사람들이 잘 보인다. 저 멀리 지평선까지 순례자들이 까미노를 따라 작은 점으로 이어진 것이 마치 검은깨가 뿌려진 것 같다. 오늘 까미노는 목적지 중간에는 ‘온타나스’라는 작은 마을 하나뿐이다. 아 이런... 출발하자마자 거센 비바람이 환영인사를 보내온다.

비 내리는 메세타는 순례자들에게 많은 인내를 요구한다


출발하여 빗 속을 6km 정도를 걷다 보니 들판 한가운데 ‘산볼’이란 푯말이 보인다. 보리밭 사이에 빨간 지붕을 한 작은 집 한 채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산볼 알베르게다. 문명을 거부한 이곳에서는 저녁이면 촛불을 켜고 순례자들이 함께 식사하며, 밤이 되면 마당에 누워 밤하늘 가득한 별을 보며 이야기 나눈다고 한다. 별을 관찰하기 좋은 조건은 빛이 주변에 없어야 하고, 맑은 공기는 필수이며 고도가 높으면 더 좋다고 하는데 800m 고원 평야 한가운데 있는 산볼, 이곳이 딱이다. “어제 여기에 머물렀다 해도 밤새 비가 와서 별을 보지 못했을 거야···” 나 혼자 스스로 위로하며 까미노에서 먼발치로 알베르게를 바라보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메세타 한복판에 전기, 수도시설 없이 운영하는 산볼 알베르게


어제 숙소에서 만난 스페인 부부가 앞서가고 있다. 이 부부들은 이번 순례길이 14번째라고 한다. 한마디로 순례길의 전설이다. 정말 궁금한 게 많은데 아쉽게 영어를 못한다. 커다란 나무 지팡이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는데, 지팡이에는 매번 순례길에 대한 이력 14개가 빼곡히 각인되어 있었다. 기념사진을 요구했더니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해 주었다.

까미노에는 정말 많은 사연들이 있었다. 이 순례자들은 14번째 걷고 있었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수많은 순례자 무덤이 눈에 들어온다. 가족들이 안타까운 사연을 담아 돌아가신 자리에 십자가를 세워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의 무덤도 꽤 많이 보이는 걸 보면 가는 데는 순서가 없다는 말이 맞나 보다. 이런 순례자 무덤은 산티아고에 도착할 때까지 수백 개 이상을 보게 되는데, 이들은 무슨 이유로 이곳에 왔으며, 어찌하여 죽음에 생명을 양보하면서까지 걸었을까?

순례길 순례자 무덤. 매일 이런 무덤을 지나가게 되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남은 가족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물며 준비되지 않은 죽음이었기에 그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이해가 될 듯하다. 죽음에 대해 누군가는 ‘하늘나라로 간다’고 하고, 어떤 이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의 별이 되든 흙으로 사라져 가든 우리는 반드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것도 순서가 없이 가는 길이기에 누구나 한번쯤은 죽음에 대비하여 자신의 삶을 중간 점검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일상에서 잠시나마 시간을 내어 혹시 모를 죽음을 대비해 놓는다면 역설적으로 내 삶에 더 집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 믿는다.


얼마를 걷다 보니 내리막 분지에 ‘온타나스’가 나왔다. 마을 초입에 스페인 국기와 태극기가 걸려 있다. 마을 카페에 들르니 순례자들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커피를 마시고 있다. 마을 입구에 태극기가 걸려 있는 사연을 물어보니 한국 사람들이 많이 방문해 마을에 도움이 되었다며 고마운 마음에 게양했다고 한다.

한국 순례자들로 마을이 부흥했다며 감사의 표시로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비도 개고 날씨도 좋아졌다. 지루한 듯 지루하지 않은 메세타를 걷다 보니 어느새 ‘산 안톤 유적지’까지 왔다. 옛날 수도원과 순례자들을 치유하는 병원, 숙소가 운영되던 곳이다. 이곳은 1146년 알폰소 7세 왕의 지시로 수도원과 대규모 병원, 나중에는 기사단의 총사령부까지 존재했다고 하며, 한때 유럽에 유행했던 괴저병을 치료하는 능력이 알려지면서 무척이나 붐비는 장소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당시 번성했을 모습이 지금의 폐허에서도 느껴질 정도다.

저 멀리 오늘의 목적지 '까스트로헤리스'가 보인다. 구름 낀 하늘을 배경으로 높은 언덕 위에 무너진 고성이 서 있고, 그 아래 높다란 첨탑을 가진 아름다운 성당이 그리고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이토록 아름 다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 마을로 들어가는 1km 남짓의 길에 핀 이름 모를 야생화, 유채꽃, 양귀비 들 마저 이쁜 마음으로 순례자들을 사열하듯 반겨준다.

까스트로헤리스 들어가는 길
성모 발현 성당으로 유명한 산타마리아 성당

마을 초입에 있는 성당 산타마리아. 전설에 따르면 성인 야고보가 이곳에서 선교를 하고 있을 때 사과나무에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다고 하여 그 자리에 세워진 성당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재는 미술관 겸 박물관으로 사용한다고 쓰여 있다. 입장료를 내고 잠시 들려 화려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들으며 오늘도 무사히 걷게 해 주셨음에 감사드렸다.


내가 예약한 숙소는 마을 반대편에 있다. 마을을 가로질러 가는데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유명한 알베르게 ‘오리온’이 보인다. 나도 이곳에 여러 차례 전화를 했으나 한국 단체 팀들이 모든 침대를 선점하는 바람에 이곳에 머물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아닌 게 아니라 알베르게 입구 도착해서 보니 단체 순례자들의 가방을 싣고 온 차량에서 수십 개의 트렁크 가방이 부지런히 내려지고 있었다.

단체 순례자 여러분, 이러면 반칙입니다.


여기 들린 이유는 이곳 알베르게 식당 메뉴에 라면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어서다. 이미 눈에 익은 한국 사람들이 하나, 둘 도착해 있다. 식당에 들어가니 젊은 스페인 청년이 반갑게 맞아주며 1시부터 점심이 가능하단다. 45분 남았다. 보통 때라면 라면 한 그릇 먹겠다고 이런 땡볕에서 45분을 기다릴 리가 없는데 라면이 뭔지 불평 없이 길가에 앉아 기다렸다. 신라면 한 그릇과 김밥 1줄을 시켰다. 제법 비싼 가격이다. 그런데 뙤약볕에 하루를 걸어온 불쌍한 한국 순례자에게 라면과 김밥은 환상적인 맛이었다. 그동안 남이 끓여주는 라면이 세상 제일 맛있다고 했는데 이젠 바꿔야겠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뙤약볕에 하루를 걷고 먹는 라면이 가장 맛있다. 반가운 한국 순례자들은 참새가 방앗간 들리듯 이곳 오리온 식당에 다 거쳐가는 것 같았다.


이제 우리 숙소 알베르게 ‘로사리아’로 가야지... 젊은 청년이 너무 살갑게 다가온다. 한국말도 제법 사용하면서 한국 순례자들에게 친절이 몸에 배어 있는 듯했다. 오랜만에 보는 단층 침대 방에는 이탈리아. 미국. 대만. 스페인 순례자 6명이 함께 했다. 샤워와 빨래를 하고 작은 동네지만 구경하러 밖으로 나갔다가 근처 작은 슈퍼가 있다 길래 잠깐 들러 납작 복숭아를 몇 개 사서 돌아왔다. 예전에 미국 살 때 많이 먹었던 추억이 새록새록 난다.


애초 계획은 오후 늦게 마을 뒤 언덕 위에 있는 고성에 올라가 마을 전경을 보고 저녁 늦게까지 머물면서 일몰을 보는 것이었는데, 잔뜩 낀 구름으로 일몰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다리 통증도 슬슬 올라와서 어차피 올라가기 어려웠을 터인데 차라리 잘 된 것인지 모르겠다.


저녁은 알베르게 주인이 추천해 주는 식당으로 갔다. 이 마을 최고의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추천해 준 곳인데, 백여 년 간 가문 대대로 이어 운영 중이라는 이 식당의 스테이크는 정말 맛있었다. 모처럼 식사 같은 식사, 만찬 같은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방에 있는 외국 분들이 이미 잠자리에 들어있었다.


나도 모든 것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침낭 속으로 바로 들어갔다.

오늘도 편안한 잠자리다. 나는 지금 신비함이 가득한 마을 ‘카스트로헤리스’에 있다.


https://youtu.be/cLNXsGXswi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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