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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오늘은 내가 나폴레옹이다 (15)

by Kevin Kim

2024년 5월 3일 금요일 (14일 차)

다시 출발, 부르고스에서 도자기마을 오르니요스



‘부르고스’에서 이틀간의 휴식을 취했다. 계획대로 병원을 가지 못한 건 아쉽지만, 휴식과 좌욕, 마사지로 다리 근육 뭉침은 많이 풀어졌고 특히 독일 할머니의 기도로 나는 정신적 회복을 이룰 수 있었다. 비록 약간의 통증을 느낄 수 있었으나 소염제와 진통제 두 알을 먹고 이른 새벽 출발 준비를 하였다. 호텔을 나서는 나에게 로비에서 근무하고 있던 스페인 여 직원이 “부엔 까미노!” 하며 사과 하나를 챙겨준다.


오늘도 숙소를 확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선착순 공립 알베르게에 들어가야 한다. 다시 말해 부지런히 걸어야 하는 뜻이다. 근처 숙소에 머물고 있던 박 선생과 연락이 되어 오늘은 함께 걷기로 했다. 박 선생은 순례길을 4차례나 경험하였기 때문에 대도시 부르고스를 빠져나가는 지름길을 잘 안내해 주었다. 5시에 일어나 배낭을 꾸리고 숙소 앞에서 박 선생을 만나 출발한다. 날은 쌀쌀하고 매섭지만, 주황색 가로등이 어우러진 부르고스의 새벽 풍경은 온화하고 예뻤다. “이틀간 잘 쉬었다. 부르고스야! 고맙구나.”

이른 새벽에 부지런히 걸어 12km 지점의 ‘따르다호스’라는 마을에 왔다. 집마다 손수 만든 순례길 표식을 벽에 달아 놓았는데 모두가 아기자기하고, 개성 있고, 훌륭한 작품 수준이다. 동네 카페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있는데 새벽에 출발한 순례자들이 하나둘 들어온다. 모두 따뜻한 커피 한잔에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하는 듯했다. 까미노를 걷다 보면 참으로 작은 것에 만족과 기쁨이 온다.

Tardajos


조금 더 걷다 보니 ‘라베 대 라스 칼사다스’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는 집마다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모두 예사롭지 않다. 자세히 보니 성경 구절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는 내용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제가 그림으로 각 가정의 벽에 그려져 있었다. 그림을 보면서 이것이 이야기하는 성경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어 하나하나 시간을 갖고 바라보았다.

마을 각 집집마다 벽에 성경구절로 벽화를 그려놓았다


사실 오늘 박 선생과 함께 걸어온 이유는 바로 이 마을에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이다. 이 마을에는 80세는 족히 되어 보이는 수녀님이 순례자들을 위해 축복 기도해 주고, 십자가 목걸이를 직접 걸어 주는 아주 작은 암자 ‘모나스테리오’가 있다. 나는 꼭 그 수녀님을 만나 기도를 받고 싶었다. 그리고 수녀님의 그 오랜 봉사와 헌신에 존경을 담아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나는 이 수녀님도 천사로 생각했다.

함께하는 박 선생도 작년에 방문했을 때 수녀님이 기도해 주었는데 정말 놀라운 마음의 안식과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며, 이번에 감사의 뜻으로 수녀님께 드릴 작은 선물을 한국에서부터 준비해 왔다고 한다. 오늘 우리가 함께 걷는 이유는 바로 함께 천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Ermita de la Virgen de Monasterio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성당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당황하여 성당 뒤편으로 돌아가 옆 문을 두드려 봐도 대답이 없다. 갑자기 불안해진다. 혹시 아프신 건 아닌지? 연세가 되셔서 요양원으로 가셨나? 아쉬운 마음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마음이 무거웠다. 한참을 망설이다 다시 까미노로 돌아갔다. 다행히 며칠 후에 만난 어느 사람이 수녀님을 만났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여전히 건강하시다는 말에 안심이 되었다. 아마 우리가 너무 일찍 도착하여 수녀님이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아쉽지만 다행이다. 그 수녀님은 계속해서 까미노의 천사 직분을 잘 감당할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순례길 오기 전에 귀가 아프게 들었던 ‘메세타 고원’이 시작되었다. 메세타는 책상을 의미하는 ‘Mesa’에서 나왔다고 하니 평평한 고원이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메세타의 시작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너른 평야에 밀밭, 보리밭과 군데군데 유채꽃이 피어 있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땅이다. 그러나 메세타 230km 고원길의 아름다움 뒤에 숨겨져 있는 열기와 건조함, 비바람과 폭풍, 지루함은 덤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 구간에서 다리 통증을 동반하게 된단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메세타를 포기하고 메세타가 끝나는 지점에 있는 대도시 레온까지 점프한다고 이야기해 준다.

많은 기다림 속에서 드디어 메세타 고원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내가 걸어보고 내린 결론은 달랐다. 이곳을 피해 점프하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걸어보니 고독과 침묵 가운데 평화와 기쁨, 성취와 만족감이 선물처럼 다가왔다. 육체의 에너지를 제물로 바치면 정신적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해 주는 것이다. 더욱이 메세타는 끝없는 평화로움 속에서도 강렬한 생명력을 느끼게 했으며, 매일 새롭게 마주치는 메세타의 고통은 마치 삶의 여정 속에서 맞닥뜨리는 역경과도 같아서 이를 극복하고 나면 그날 밤 꿈속에서는 전혀 새로운 평안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이 구간에서 사회생활 가운데 몇 번의 어려웠던 시절을 되돌아보았고, 내 마음 가운데 똬리처럼 자리하고 있는 거북한 마음들이 대부분 해소되는 힐링을 맛보게 되었다.


아름다운 메세타의 사나운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아니 바람이 나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뭔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이 느껴졌다. 내가 걸어온 인생에 대해, 앞으로 가야 할 여정에 대해 그리고 내가 바라는 소망에 대해 묻는다. 이 메세타가 끝나기 전까지 내 소망에 관해 대답해야 할 것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메세타는 지평선이 하늘과 합쳐지는 곳이다. 황금의 땅이 펼쳐진 이 너른 들녘에는 모든 것이 침묵으로 덮여 있고 땅은 바람을 통해 속삭이듯 말을 걸어온다. 이 길의 먼지 알갱이에는 앞서간 순례자들의 사연이 남아있으며 그들의 이야기는 지금 바람 소리가 되어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비록 이 고원에서 길은 단순하고 여정은 지루하겠지만, 메세타를 마치는 날 내 가슴은 따뜻한 위대함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한참을 걷다 보니 내리막이 나오는데 저 멀리 작은 마을이 보인다. 벌써 오늘의 목적지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다. 발목이 아프지 않고 걸어왔음에 약간의 흥분과 기대가 몰려왔다. 이 마을은 도자기를 굽는 마을로 유명했다고 한다. 각 가정마다 도자기를 굽는 화덕(Horno)이 있어 마을 이름이 탄생했다고 한다.

바람 부는 언덕에 서서 오늘의 목적지 오리니요스를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작은 마을의 모든 숙소는 이미 동이 났다. 마지막 희망은 성당에서 운영하는 공립 알베르게 밖에 없는데 침대가 20여 개 밖에 없단다. 서둘러야만 했다. 마을 입구에 도달하자 박 선생이 공립 알베르게에 선착순 줄을 서 주겠다고 먼저 뛰어갔다. 박 선생은 사립 알베르게에 예약한 상태이기 때문에 뛰어갈 이유가 없음에도 내가 빨리 걷지 못하니 도와주려 먼저 간 것이다. 얼마를 걷는데 카톡으로 연락이 왔다. 오늘 침대 배정 숫자 이내이니 천천히 오라고 한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길게 배낭들이 연결되어 있고 먼저 온 사람들이 박수를 쳐 준다. 잠시 후 순식간에 배낭 20여 개가 정렬되고 만석(Full)이라는 표식이 문 앞에 걸렸다.

이미 알베르게 앞에는 먼저 온 순례자들의 배낭이 줄을 서 있었다


이른 도착으로 배낭 정리 후 식당에 가서 모처럼 맛있는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여유로운 마음으로 성당 앞마당에서 쉬고 있는데 숙소를 구하지 못한 많은 순례자가 다음 마을로 넘어가는 것이 보인다. 가장 가까운 마을은 ‘산볼’인데 여기는 이미 자리가 없다고 한다. 결국 11km 떨어진 ‘온타나스’까지 가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곧 해가 질 것이고 또 비가 내릴 것 같다. 먼저 숙소를 점유한 죄 아닌 죄로 미안한 마음을 갖고 떠나는 순례자들을 바라본다. 체력상 더 걸을 수 없는 사람들은 택시를 불러 타고, 어떤 사람은 “어떻게 되겠지!” 하며 무작정 걸어서 출발한다.

더 걸어갈 체력이 안 되는 노부부는 결국 택시를 불렀다


작은 마을에 머물다 보면 반가운 얼굴들을 쉽게 만나게 된다. 에스테야에서 저녁을 같이한 이천 아주머니도 만나고, 영상 제작한다는 젊은 청년, 독일에서 왔다는 켈리, 아내가 복통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년 부부, 아빠랑 같이 온 부녀 등 반가운 얼굴들을 모두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밥 & 테라 부부도 또다시 만났다. 우리는 항상 다시 못 만날 것 같다며 아쉬움에 사진을 찍고 헤어졌는데, 며칠 후 또 만나서 사진 찍고 또 헤어지고 또 만난다. “아마 우리 내일 또 만날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오늘도 마지막 사진을 찍어야겠지?” 하며 테라가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자고 한다. 이쯤 되면 우연이 아니라 인연이다.


숙소와 연결되어 있는 성당에서 진행하는 순례자 미사에 참석했다. 비록 알아듣지 못하는 스페인어 미사이지만, 신부님의 목소리가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마음에 평안을 주는 것 같아 좋았다. 나는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 마음 문을 최대한 열어놓고 축복 메시지를 정성으로 담아 듣고 왔다.

IGLESIA DE "SAN ROMÁN MÁRTIR"에서의 순례자 축복 미사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메세타를 걷게 될 것이다. 어떤 풍광과 어떤 만남 그리고 어떤 깨달음이 있을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조용히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모양으로 도와주고 배려해 준 많은 순례자를 생각한다. 부지불식간에 천사를 만나 대접하기도 하고, 대접받기도 한다는 성경 말씀이 생각났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오늘 만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 같다. 지금 이 작은 방에도 10여 명의 천사들이 코 골며 잠들어 있다. 그러나 나는 쉬 잠이 오지 않았다. 모든 게 감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르니요스의 밤은 깊어갔다.


창문으로 성당 광장에 켜진 주황색 가로등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실비 오는 소리가 정겹게 방 안으로 흘러왔다.


https://youtu.be/Q2clO15Za_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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