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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노에서 길을 잃다

오늘은 내가 나폴레옹이다 (31)

by Kevin Kim

2024년 5월 19일 일요일 (30일 차)

호수에 비친 마을 포르토마린



오늘부터 순례자가 엄청 많을 것이라는 경고가 있었다. 걷는 길에도, 들려가는 카페에도 그리고 숙소에도 만원일 것 이라고 이야기 한다. 나는 혼자 조용히 걷고 싶어 평상시보다 1시간 앞당겨서 5시에 출발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작전은 철저히 실패했고 완전히 죽을 고생을 하게 된다...


어제 머문 알베르게가 까미노 루트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사리아 반대편에 있다 보니 어제 걸어왔던 길을 따라 되돌아가는 길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구글 맵을 검토하여 까미노 중간으로 접속 가능 한 지름길을 찾아내고 숙소를 나왔다. 날씨는 쌀쌀하지만, 공기는 상쾌하고 컨디션도 나쁘지 않았다. 길은 깜깜했고 일요일 새벽길에는 사람 흔적도 없이 약한 비에 바람은 스산했다.


시내를 한참이나 걸어 순례길로 접속할 수 있는 오솔길 입구까지 찾아왔는데... 어쩐다냐... 이 길은 어두운 산을 넘어가는 길이었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다. 더군다나 몇 발자국 걷다보니 바닥에 물이 너무 많은 진흙 오솔길이었다. 지금까지는 이런 산길을 잘 넘어왔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이 길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고 무서운 기분마저 들었다. 한참을 기다려 사람이 오면 같이 가려 했지만 일요일 이른 시간이다.


지도를 다시 살펴보니 국도를 따라 3km 정도 더 가면 교차로가 나오고 여기에서 좌회전하면 까미노에 접속할 수 있겠다 판단하고 아무도 없는 새벽 국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40분을 걸어 교차로에 도착하고 보니 내가 올라타야 할 도로가 고가도로를 통해 하늘 위로 지나가고 있는 게 아닌가? 도저히 갈아탈 방법이 없다.


아까 그 오솔길로 되돌아가야 하나? 계속 가야 하나? 결정을 못하고 망설이다 이미 교차로를 지나버렸다. 가자! 이제 방법이 없다. 직진이다.

한 시간 반을 지나니 조금씩 밝아오고 있다


추가로 한 시간 정도를 걸었는데도 까미노와 연결할 수 있는 길이 나오지 않는다. 가끔 지나가는 차가 보여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세워주지 않는다. 하기야 이 밤중에 해드 랜턴 쓰고, 시커먼 판초 우의 뒤집어쓴 사람이 이렇게 어두운 산길에서 손을 들면 세워줄 사람이 있겠나? 나라도 자동차를 멈춰줄 것 같지 않아 포기했다.

아무도 없는 이 길을 두 시간 가까이 걸었는데 까미노 길로 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점점 먼동이 터오고 있으나 여전히 대책이 없다. 어찌 되겠지? 마음은 타들어가고 입술은 더욱 바짝 마르고 입안은 온통 모래 투성이가 되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걷자. 한 낮이 되면 택시든 뭐든 지나가겠지...


그냥 터벅터벅 걷는데 저 앞에서 소형차 한 대가 작은 오솔길에서 나오다 큰길로 들어오기 위해 잠시 멈춘다. 손을 흔들며 뛰어가니 젊은 여성 운전자다. 그런데 영어를 전혀 못 한다. 손짓발짓하며 까미노로 데려다 달라고 했는데 못 알아들어 마지막 수단으로 지도를 보여주며 “여기! 여기!” 했더니 알아들었는지 타라고 신호한다. 한참을 달려 노란 화살표가 보이는 오솔길 입구에 내려주고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뭔가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소통할 방법이 없어 서로 얼굴만 마주 보다 웃으며 헤어졌다.

두 시간 여 만에 까미노로 되돌아왔다


순례자들은 최선을 다해 노란 화살표를 찾다 순례길에서 벗어나면 죽음을 맞이하듯 염려한다. 사실 산티아고 순례길이란 것이 정해진 루트가 있다고는 하나 이는 편의상 정해진 것일 뿐 어느 길로 가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여 야고보 무덤을 참배하고, 산티아고까지 가는 그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일이다. 따라서 순례길에서 길을 잃었다는 말은 어쩌면 옳지 않은 말 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최선을 다해 걷고 천천히 방향을 조정하여 산티아고로 들어가면 될 일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오늘 아침 나는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입안은 사막이 되었고 입술은 타들어 가 갈라진 논 같이 되었었다. 길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은 것인데도 말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일생의 여정은 어차피 낯선 길을 가는 것이고 정해 진 길도 없다. 어쩌면 창의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차라리 길을 잃어버리는 게 축복일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되돌아온 까미노는 고요하고 한적했다


조용한 순례길을 한참 걷다 보니 저 멀리 한국 순례자 부녀가 오고 있다. 잠시 기다려 함께 걸으며 아침 해프닝을 영웅담처럼 이야기하였다. 나에겐 이번 순례길에서 최고의 고난으로 느꼈으니 얼마나 이야기하고 싶었겠나? 그런데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작은 해프닝 수준으로 들릴 뿐이었다. 아마 우리 삶에서도 이런 사례가 많을 것 같다. 내가 직접 느낀 것과 다른 사람의 간접 경험은 전혀 다른 감동으로 다가오니 말이다. 이럴 때 실망하지 말자. 이게 당연한 것이다.

이른 출발로 인해 길을 잃고 시간이 낭비되었음에도 순례길이 한적해서 좋았다


이곳 갈리시아 지방은 비가 많이 오는 지방인가 보다. 주변의 돌, 바위 그리고 나무에도 온통 이끼가 앉아 있다. 그리고 깊지 않지만 제법 울창한 산림은 까미노를 걷는 앞뒤 순례자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어 더욱 신비스럽고 오늘 같이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경우에도 좋았다.

갈리시아 지방은 도시도 많았지만 숲도 역시 많다. 이끼낀 숲이 주는 감성은 또 달랐다


한국에서 부녀가 같이 온 경우는 흔치 않을 것 같다. 아빠는 몇 년 전 혼자 이 길을 걸으셨고 이번에 다시 혼자 오려 준비하고 있었는데, 마침 딸이 직장에서 시간이 나게 되어 같이 왔단다. "어느 날 뒤에서 아빠를 바라보는데 그렇게 크고 단단해 보였던 아빠의 어깨가 유난히 좁고 작아 보였어요. 그때 아빠가 늙어가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애잔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번에 같이 오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따라나섰는데 참 잘했다 생각해요." 한다. 정말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늙어 간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되돌아갈 수도 없다. 노령 자체는 존경할 대상이 아니다. 오랜 경험과 삶의 지혜를 바탕으로 후대에 본보기가 되고 그의 걸어간 길을 자신 있게 따라가도 된다는 믿음을 심어 줄 때 비로소 존경이 뒤따를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결과가 아니라 걸어온 발자국이 더 중요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늙어가는 것을 인정하고 또 피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절대 정신만큼은 늙어가도록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100km 표지석'이 나왔다. 수많은 표지석을 지나왔지만 100km 표지석은 정말 의미가 다르게 다가온다. 좋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서운하다고 해야 할까? 다른 표지석이 단순하게 순례자에게 남은 거리를 알려 주었다면, 100km 표지석은 순례길 종료를 준비하고 남은 거리를 알차고 의미 있게 걸으라 이야기하는 것 같다.


보통 프랑스에서부터 걸어온 순례자들은 이 표지석을 지나면서부터 순례길이 끝나가는 것이 너무 아쉬워 걸음을 천천히 걷는다고 한다. 나도 그랬다. 더 걸어갈 수 있음에도, 예약된 숙소가 있음에도 더 걷기 싫어 아니 남은 거리가 짧아지는 것이 싫어 걸음을 멈추고 배낭을 내려놓게 되었다.

100.000Km

해가 중천에 떠오르자, 어디에서 쏟아져 나오는지 모를 많은 순례자들이 보인다. 여태까지는 까미노에서 한두 시간 이상 혼자 걷는 일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건 행복했던 추억으로 돌려야 할 것 같다. 조금 전에도 버스가 한 대 도착하더니 한 무리의 순례자가 내려 떠들썩하게 걸어간다. 그렇지만 상관은 없다. 사람이 많으면 많은 대로 나는 나의 방법으로 즐기면 되는 일이다.

앞에 보이는 순례자들은 방금 전 버스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에 배낭에 토마토와 체리를 비상식량으로 준비해 왔는데 오늘 아침 길을 잃어버리고 또 배가 아픈 바람에 먹지도 못하고 오늘의 목적지에 거의 다 와 버렸다. 저 멀리 ‘포르토마린’이 내려다보이는 ‘빌라차’ 마을 언덕에 앉았다. 이제 2.5km밖에 남지 않았다.

멀리 포르토마린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앉았다


지금 더 걸어가야 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나는 길가 작은 바위에 앉아 체리를 꺼내 먹으며 지나가는 한 사람 한 사람들을 관찰하였다. 지금 이 길을 걷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행복'이 쓰여 있었다. 오늘 시작했거나 프랑스에서부터 걸어와 마무리를 하고 있거나 상관이 없어 보였다. 화를 내거나, 속상해하거나, 우울해 보이는 순례자는 단 한 명도 지나가지 않았다. "부엔 까미노!" 길가에 앉아있는 나에게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두 외친다. "좋은 순례길 되세요~."


까미노에 와서 느낀 사실인데 여기에서는 자신의 신분과 지위, 경제적 여건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직 누가 더 건강 한가? 누가 더 외향적으로 활발하게 소통하고 정보를 얻는가? 이것만이 필요하다. 특히 건강한 사람이 까미노에서는 왕이다. 그 사람이 사회에서 어떤 직업을 가졌건 어떤 지위에 있었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대기업 사장. 교수. 엄청난 부자 이런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말 공평하고 평등한 길, 이곳이 순례길이다. 맘에 든다.


포르토마린은 호수 가에 자리하고 있다. 갈리시아 지방에서 가장 길고 큰 강인 미노 강을 막아 만든 저수지 '벨레사르’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아름답게 조성된 새로운 도시인데, 원래 마을은 수몰 지역이 되었지만 이곳 언덕으로 이전하여 새롭게 건축했기에 마을은 깨끗하고 단정해 보인다.

호수 위에 건설된 다리를 건너 포르토마린으로 들어간다


언덕 위 마을로 올라가는 돌계단 ‘포르토마린 계단’을 올라가면 작은 예배당이 나오고, 그 예배당 밑을 통과하면 비로소 포르토마린이다.

포르토마린 계단


중앙 도로를 따라 언덕 위로 올라가면서 양 옆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가장 높은 언덕 끝에는 '성 요한 교회'가 나온다. 이 교회는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요새 기능을 넣어 건축하다 보니 이게 성인지 교회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특이한 모습이다. 이 교회에는 템플 기사단이 머물면서 병원과 교회 역할도 함께 했다고 한다.

성 요한 교회


예약된 사립 알베르게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리 크지도 않은 방에 100여 명이 사용할 2층 침대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숨도 쉴 수 없을 정도이다. 무슨 2차 대전 때 야전 병원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순례자들이 사용하는 저렴한 숙소이지만 인간 존중, 개인 프라이버시 같은 단어는 과도한 욕심이란 말인가? 숙소 주인은 “무엇이 문제인가? “라는 표정이다. 전혀 문제의식이 없다. 나는 스페인 정부에서 이런 숙소를 허가해 준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 화재가 났을 경우도 안전상 엄청난 문제가 예상되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알베르게, 저 커튼 뒤에도 이런 침대가 빽빽하게 놓여있다


국적 불문하고 숙소에 도착한 순례자들이 탄성을 자아내며 동영상 찍기에 바쁘다. 크리스도 왔고, 이라체 와이너리에서 만났던 70대 한국 순례자, 대만에서 온 부부 순례자 등 모두가 고개를 저어댄다. 주인은 정신없이 도착하는 순례자들을 계속해서 방으로 집어넣는다. 배낭을 내려놓고 침대 정리를 하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나는 주변 순례자들에게 이야기하고 그대로 나왔다.


일단 몸만 빠져나와 인근 호텔, 호스텔, 알베르게를 찾아다니며 남는 방, 침대를 수소문했다. 아니 사정을 했다. "방 하나만 줄 수 없겠니?"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깨끗한 알베르게에서 침대를 하나 확보했다. 힘들고 슬픈 표정을 하며 “어느 어느 알베르게에서 왔노라” 하니 이 숙소 주인도 고개를 흔들며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비상용으로 남겨 두었던 침대 하나를 내준 것이다. 가끔은 슬픈 표정, 힘든 표정을 짓는 것도 삶의 지혜인 것 같다.

포르토마린 중앙도로와 시내 모습


새로 옮긴 숙소에 한국 사람들이 많았다. 많아도 정말 많았다. 아니 숙소 말고도 포르토마린 그 작은 마을의 좁은 골목길 어느 곳에서도, 식당과 가게에도 온통 한국말이 들린다. 마치 강원도 어느 유명 리조트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알베르게 주방은 이미 한국 사람들이 점령해 버렸고 다른 외국 순례자들이 밀리는 기분이었다. 나도 그랬다. 순례길 30일 만에 처음으로 음식을 해 먹어 보겠다고 슈퍼에서 인스턴트식품 하나를 사 왔는데 도저히 저들과 경쟁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냥 버리고 혼자 마을로 올라가 어제 먹지 못했던 문어 요리를 주문해서 먹었다.


사리아부터는 사람도 많지만, 까미노 마을들이 제법 큰 도시로 연결되다 보니 알베르게, 식당, 카페, 바 등도 상대적으로 많았다. 다만, 그동안이 순례길이었다면 오늘부터는 여행지 기분? 까미노는 이렇게 변화되어 갔다. 그래도 나의 순례길은 종착역을 향해 가고 있다. 이제 4일만 걸으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한다. 그런데 오늘도 비가 온다. 벌써 일주일 이상 하루도 빼놓지 않고 비가 내린다.


비야 내일은 제발 멈춰다오~~


https://youtu.be/s0NUmO7drp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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