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선운사까지 가려고 그래
브런치며 인스타며 페북이며 온 동네 꽃 사진들이 피드를 채운다. 광양이며 선운사며 어디며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목련과 만개한 산수유, 수선화, 매화꽃 사진들이 한가득이다. 인스타그램(으로만) 친구인 어떤 분은 전국 팔도를 여행 다닌다. 제철 음식 찾아 먹듯 계절마다 딱 예쁜 지역을 찾아 여행하고 실시간으로 사진을 올려 주신다. 지금은 고창을 여행 중이며 매일매일 꽃 사진과 선운사의 고즈넉한 풍경이 담긴 사진이 올라오고 있다.
가만있어 보자, 선운사라면 여기서 운전해서 가면 1시간 10분이면 도착하는데? 앗, 이렇게 가깝다니! 새삼 놀래버렸네! 맨날 간다 간다 해놓고 못 간 곳인데. 이 참에 나도 봄 나들이 좀 해야 하지 않을까? 빨리 어디든 나가야 할 것 같아 덩달아 드릉드릉한다. 하지만 그 설레발의 꼬리를 물고 한 발자국 더 들어가 보면, 결국 인스타그램이나 페북에 꽃 사진, 봄 사진 한 장 올리고 싶은 욕망에 귀결한다. 물론 꽃 구경은 언제나 설레지. 좋지. 하지만 전적으로 꽃이 좋아서만은 아닌 셈이다. 그 뒤에 올릴 사진이 필요하다는 욕망이 마음속에 또렷하게 있다.
우리는 한 달 생활비가 정해져 있다. 시골에서 살기 위해 10여 년 전부터 소비 규모를 줄여왔고 지금도 정해진 생활비 내에서만 소비하고 있다. 소비를 줄일 때 제일 먼저 손 보는 곳이 어디인 줄 아는가. 바로 식비다. 외식은 한 달에 많아야 두세 번, 그것도 6,000원짜리 간짜장이 대부분. 최대한 집에서 밥을 먹는다. 미식? 일전에 한 선배네 집에서 맛봤던 그라브락스 연어를 또 먹어보고 싶지만 양이 적고 비싸다. 참는다. 미식에는 돈이 많이 필요하다. 장보기도 집 근처(라고 해도 차 타고 15분이지만) 하나로 마트로 아예 정착했다. 이마트에 가면 별거 안 산다고 해도 꼭 이십만 원씩 쓰더라. 이렇게 쓰고 보니까 좀 처량 맞아 보이기도 하는데, 어쩌랴.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 다행히도 남편과 나는 된장찌개에 제육볶음만으로도 맛있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
미식도 멀리하며 사는데 풍광을 음미하는 여행이라니. 우리 마을에서 제일 저렴한 주유소도 휘발유 값이 1,950원. 이런 고유가 시대에 봄나들이하자고 휘발유 몇 리터를 쓰겠다고? 게다가 꽃 사진 한 장 올리고 싶은 관종욕 충족을 위해서? 아니 될 말이다. 고개를 휘휘 젓는다. 휘발유 값 좀 내려가면 가보던가. 그땐 이미 꽃은 다 졌겠지만 뭐. 봄 다 가고 없겠지만 뭐.
그러다 불현듯 깨달았다. 봄은 이미 우리 집에 우리 밭에 우리 마을에 다 있었다. 집집마다 서너 그루씩 가지고 있는 매실나무에는 매화꽃이 만발했다. 마을길 초입 언덕에 있는 영길이 아저씨네 집 옹벽 밑에 노란 수선화가 옹기종기 피어 있다. 그렇게 들락날락했는데도 꽃이 피기 전에는 수선화가 있는 줄도 몰랐다. 옆집 조 씨 어르신네 화단 주위를 두른 꽃잔디에 자주색 꽃이 피기 시작했다. 우리 마늘밭에는 마늘 싹이 하루게 다르게 자라고 있다. 겨우내 비실대던 양파도 벌떡 일어섰다. 마늘 밭두둑에는 네모필라를 닮았지만 네모필라는 아닌 것 같은 이름 모를 잡초의 파란 꽃이 만발했다. 비리비리하던 월동 시금치도 봄비를 맞고 쑥쑥 자랐다. 얼마 전까지 누렇게 쓰러져 죽은 줄로만 알았던 쪽파는 이제 뽑아서 김치를 담아도 될 정도가 되었다.
이러니, 봄이 왔다고 딱히 어딜 가고 싶겠느냔 말이다. 이미 여기에서 봄을 충분히 다 만끽해버렸다. 아,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도 다 건졌고 말이지.
ps. 선운사에 가려면 얼마치의 휘발유를 쓰는 건지 자못 궁금해져서 계산해봤더니 대략 20,000원.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만 원 때문에 지질하게 이런 글을 쓴 거야? 아무도 안 물어봤는데 막 여기에도 봄 다 있어! 라며 정신 승리하고? 갑자기 현타가 왔다. 안 되겠다. 선운사까지 가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