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일들
처음으로 이곳에서 봄을 맞았던 작년 봄에는 날이 풀리기 시작하는 3월부터 분주했더랬다. ‘봄’이라 하면 3,4,5월이고, 농사는 봄부터 시작되니 3월부터 바빠야 하는 줄 알았다. 3월이 되자마자 대파 모종도 내고 상추 모종도 내고 바질, 애플민트, 스피아민트 모종을 낸다고 혼자 요란을 떨었다. 하지만 3월 둘째 주가 지나도록 마을은 여전히 새소리만이 들렸다. 그리고 알았다. 3,4월은 사부작사부작 농사 준비만 쉬엄쉬엄 하다가 본격적인 영농철은 5월과 함께 시작된다는 걸.
그리하여 두 번째 봄을 맞이한 나는 학습의 동물답게 느긋했다. 그런 마음 때문인지 날이 풀렸는데도 쉽사리 밖에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2월부터 새로 시작한 재택 아르바이트 때문에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줄어들기도 했고. 겨울 내내 잔뜩 게으르게 지내다가 다시 밭일을 시작하려니 몸이 선뜻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나마 남편의 재촉으로 설렁설렁 밭일을 시작했다. 한 명이라도 부지런해서 얼마나 다행인가.
그저께는 단감나무 아래에 잔뜩 쌓여있던 베어낸 나무들과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온갖 잡초들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여기저기 뻗어서 말라버린 환삼덩굴 줄기들을 모두 걷어 내었다. 남편이나 나나 깔끔한 성격이 아니어서 밭 주변도 조금 엉망이다. 동네에 좀 창피하긴 하지만 사람 성격이 뭐 어디 가겠나.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살자'가 우리의 모토다. 감나무 아래 마른풀도 뽑고 삐죽삐죽 솟아난 대나무도 베어내다 보니 낙엽 밑에 아기 손바닥만 한 머위가 잔뜩이었다. 감나무 잎 때문에 보이지 않았을 뿐 올해도 무성하게 자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머위 꽃도 솟아 있었다. 아, 머위 꽃. 아, 머위 (꽃) 된장.
머위 된장은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 겨울과 봄 편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주인공이 봄이 이제 막 시작된 밭에서 머위 꽃 순을 채취해서 씻고 데치고 쫑쫑쫑 썰어서 된장과 섞어 볶은 요리. 막 지어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밥 위에 조금 얹어서 먹던 모습. 그릇에 약간 덜어내어 뜨거운 물을 부어 즉석 머위 미소 된장국을 만들어 먹던 장면. 영화에서 나왔던 여러 요리 중에 유독 마음이 움직였던 음식이었다. 겨울과 봄 사이 언저리에서 우리 머위 밭을 헤쳐 머위 꽃을 따내리라, 나도 머위 된장을 꼭 만들어 보리라 다짐했더랬는데. 나는 천재적으로 게으르다. 그렇게 첫 번째 겨울과 봄 사이를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제, 봄이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나서야 활짝 만개하기 직전의 머위 꽃을 마주하게 되었다. 영화 속 머위 꽃은 작은 몽오리였는데 이 시기의 머위 꽃은 필 준비를 끝내고서 잔뜩 부풀어 있었다. 이걸로도 될까. 집에 들어와 구글에 레시피를 검색해봤더니 ADBADA님의 글이 보였다. 뭐가 필요하나? 머위 꽃, 미소 된장, 설탕, 맛술, 참기름. 미소 된장? 하, 그런 게 있을 리가. 우리 집에는 슈퍼에서 산 청정원 순창 재래식 된장밖에 없는데. 지금 미소 된장을 주문해봤자 다음 주에나 올 테고, 그 사이 꽃이 다 피어버릴 텐데? 올해도 망했다 싶었다.
그러고는 어제 책상에 앉아 일을 하다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미소 된장이 없으면 청정원 재래식 된장으로!!! 그렇지, 된장이면 뭐든 되는 거 아닌가? 바로 책상을 박차고 나가 머위 꽃 7개를 끊어 왔다. 잘 씻어서 데치고 쫑쫑쫑 썰었더니 누구 코에 붙이나 싶은 양이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된장을 넣고 참기름 조금 두르고 미림 살짝 넣고 설탕 설설 뿌리고 달달달 볶아 보았다. 볶다 보니 머위의 초록색이 너무 많이 보여서 된장을 더 넣었더니,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머위의 맛과 향이 너무 죽었다. 하지만 괜찮다. 이번의 실패로 다음에는 훌륭한 머위 된장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때에는 반드시 봄이 막 시작되는 3월 초에, 감나무 아래를 헤쳐 피기 전의 꽃 순과 미소 된장으로 만들어야지.
시골에 살면 이렇게 계절마다 또는 일 년에 한 번, 반드시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지금, 여기”에서 살고 싶어서 이곳에 왔으면서도 마음은 늘 게으름 앞에 턱없이 무너진다. 그러니 결국은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닐 테다. 지금을 놓치지 않으려면 사랑하는 마음이 많이 필요하다. 머위 된장을 사랑하는 마음 같은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