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브랜딩 관점으로 묻는 영화관의 존재 이유
한때 우리 주말 문화 중심이었던 영화관은 이제 위기의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주말이면 긴 줄을 서고, 예매 전쟁을 치르며, 팝콘 냄새 가득한 상영관을 찾던 그 풍경은 코로나19 이후 크게 바뀌었죠. 팬데믹은 일시적이었지만, 그 시기 동안 소비자들의 콘텐츠 소비 방식은 근본적으로 달려졌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OTT의 비약적인 성장을 불러왔고, 동시에 영화관이라는 오프라인 공간의 존재 가치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요즘 주변 사람들과 영화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보면 이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 영화 넷플릭스에 뜨면 봐야지." 이젠 개봉 즉시 극장을 찾기보다는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웨이브 등 자신이 선택한 OTT 플랫폼에서 편한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기기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대입니다. 더군다나 OTT는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며, 소비자들의 충성도를 확보해 나가고 있죠. 이와는 반대로 국내 영화관 매출은 급격하게 하락했고, '극장'이라는 공간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국내 멀티플렉스 대표 3사인 롯데시네마, CGV, 메가박스는 현재의 위기를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요? 최근 이들은 단순한 콘텐츠 제공자로서의 영화관이 아니라, 공간 자체로 소비자에게 가치를 전달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프리미엄 상영관은 그 중심에 서있죠. 롯데시네마는 세계 최대 스크린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수퍼플렉스(Super Flex) G'관을 리뉴얼하여 소파배드, 리클라이너 등 좌석 하나하나를 프리미엄화시켰습니다. 또한 MX4D라는 기술을 도입해 영화관에서 관객이 향기, 진동, 물 등 오감을 자극하는 4D 관람 경험도 제공하고 있죠. CGV도 일찍이 아이맥스 독점 상용을 활용해 '오펜하이머'와 같은 작품에서 일반관 대비 두 배 이상의 좌석 판매율을 기록한 바 있죠. 메가박스도 '돌비(Dolby) 시네마'를 도입해 고화질 영상과 입체 음향을 기반으로 한 프리미엄 체험을 전국 주요 지점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국내 멀티플렉스 대표 3사들은 OTT가 줄 수 없는 압도적 몰입감을 선사하는 프리미엄 상영관이라는 공간 브랜딩으로 돌파구를 찾는 모습이죠. 하지만 단순히 영화관의 기능을 더 높인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프리미엄 상영관으로만 돌파구를 찾는다면 향후 차별성 확보에도 분명 한계가 나타날 것입니다.
오히려 콘텐츠 측면에서 영화관을 다각화 시키는 '얼터콘텐츠(Alternative Content)'가 더 좋은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얼터콘텐츠란 극장에서 영화를 대체할 수 있는 스크린 콘텐츠를 말하죠. 좋은 사례로는 CGV와 KBO의 협업으로 야구 경기를 극장에서 생중계하는 '뷰잉 파티'를 들 수 있습니다. SCREENX 3면 상영 기술을 활용해 관중석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관람 방식을 선보이며, 스포츠 관람의 공간을 확장했죠. 공연예술도 영화관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메가박스의 ‘클래식 소사이어티’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유럽 명문 오케스트라 등의 작품들을 정기적으로 상영하며 클래식과 오페라 팬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뮤지컬 실황 영화인 '엘리자벳: 더 뮤지컬 라이브'는 4만 5천여 관객을 모으며 공연 실황 영화 중 역대 최고 흥행을 기록했죠. 이처럼 공연, 클래식, 미술 등 다양한 장르가 영화관이라는 공간을 차지해가고 있으며, 이는 영화관의 콘텐츠 다변화 전략이 효과를 거두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공간에서 보여줄 수 있는 콘텐츠의 폭을 더 넓히는 방법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특히 K-POP 아티스트의 콘서트 실황 영화는 팬덤 기반 얼터콘텐츠의 대표격입니다. 임영웅 콘서트 실황은 35만 관객을 돌파하며 공연 실황 영화 중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고, 하이라이트, 아이브 등 다양한 아티스트가 잇달아 영화관에서 팬들과의 접점을 확대해나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화관을 콘서트장, 팬미팅 공간, 체험의 장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는 OTT가 제공할 수 없는 집단적 몰입과 현장성을 기반합니다. 한편, 짧은 러닝타임과 저렴한 가격으로 승부하는 ‘스낵무비’도 주목할 만합니다. CGV는 12분 59초짜리 단편영화 ‘밤낚시’를 단돈 1,000원에 상영해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었고, 이후에도 ‘4분 44초’처럼 숏폼 콘텐츠를 상영하며 새로운 관객층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이제 영화관은 더 이상 ‘영화’를 팔지 않습니다. 그들이 파는 것은 ‘공간’이며, ‘경험’입니다. 영화관이란 공간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단연코 대형 스크린과 동시 관람을 가능케 하는 구조이죠. 이는 공연, 스포츠, 팬덤 콘텐츠, 단편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가 공존할 수 있는 인프라이고, OTT나 개인 기기가 제공하지 못하는 집단적 경험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이 ‘공간’이 필요한 고객은 누구일까요? 지금은 이를 다시 정의해야 할 때 입니다. 프리미엄 관람을 원하는 시네필, 콘서트에 갈 수 없는 지방 팬덤, 함께 몰입하고 싶은 스포츠 팬, 새로운 포맷의 문화 콘텐츠를 경험하고자 하는 실험적 소비자까지, ‘관객’의 정의를 재구성하는 일이 곧 영화관의 미래 전략이 될 것입니다.
이제 영화관은 ‘영화상영업체’라는 좁은 정체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는 공간 브랜딩 관점에서 ‘문화 경험 공간 플랫폼’으로 재정의할 시점입니다. 소비자가 굳이 영화관을 찾아야 할 이유를 공간 자체에서 설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단순한 리뉴얼이나 이벤트가 아닌, 공간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설정하는 브랜딩 전략으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묻고 싶은 질문은 “영화관은 필요 없는가?” 아니라, “지금 이 공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답은 ‘다시 영화관을 찾고 싶게 만드는 공간’에 있습니다. 지금의 변화는 시작일 뿐입니다. 어쩌면 머지않아 ‘영화관’이라는 단어조차 다른 이름으로 대체될지 모르겠습니다. 브랜드는 시대를 반영해야 하고, 영화관의 브랜딩 또한 이제 새로운 서사를 써야 할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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