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 관중 시대, 시니어 팬은 어디에?
2024년, KBO 리그는 사상 처음으로 정규 시즌 관중 1,000만 명 시대를 열었습니다. 정확히는 10,887,705명. 한국 프로스포츠 역사상 전례가 없는 숫자라고 하죠. 젊은층의 유입, 경기 콘텐츠의 다양화, 굿즈와 팝업 스토어 등 팬덤 마케팅의 활발한 시도, 그리고 경기장을 하나의 문화 공간으로 확장하려는 노력들이 이러한 결과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확실히 지금의 야구장은 과거와 다릅니다. 더 젊고, 더 디지털화되었으며, 팬 경험은 보다 감각적이고 입체적입니다. 하지만 이 눈부신 성과의 이면에 있는 그림자도 분명 존재합니다. 바로 오랜 시간 한국 프로야구 팬덤을 지탱해온 장년층, 특히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시니어 팬들의 소외 문제입니다.
야구는 오랜 세월 동안 세대를 넘나들며 사랑받아온 스포츠입니다. 해태 타이거즈, OB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 등 팀들의 전성기를 함께한 장년층 팬들은 야구장이 지금처럼 젊고 힙한 공간이 되기 훨씬 전부터 프로야구를 직관하며 응원해왔죠. 그러나 지금, 이들은 점점 야구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문제는 온라인 예매 시스템의 벽입니다. 2024 기준, KBO 리그의 정규시즌 입장권 온라인 구매자 중 60대 이상은 단 1.4%에 불과했습니다. 포스트시즌 입장권은 전량 온라인 예매로만 판매되며, 심지어 일부 구단은 멤버십 등급에 따라 선예매권까지 부여했죠. 앱 설치부터 로그인, 결제까지 모든 과정이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당연한 절차지만, 고령층에겐 명백한 장벽입니다. 또한 프로야구 중계 독점권을 가지고 있는 OTT서비스 티빙 가입 자체를 부담스러워 하는 고령층도 많습니다. 고령층이 직관에서 중계 시청까지 소외되는 현실은 결국 디지털 접근성의 문제이자, 그들이 경기장이라는 커뮤니티에서 배제되는 구조적 문제로 이어집니다. 고령층이 KBO 리그를 지탱해온 기존 팬덤임에도 불구하고, 디지털화된 서비스 환경 속에서 점점 소외되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다행히 일부 구단은 디지털 취약 계층을 위한 서비스 개선에 나섰습니다. 그중 선도적인 사례는 '롯데 자이언츠'입니다. 롯데 자이언츠는 KBO 10개 구단 중 최초로 디지털 소외계층을 위한 현쟁 예매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홈구장인 사직구장 전체 좌의 약 0.3%에 해당하는 70석을 내야 테이블석부터 외야석까지 고르게 배정해 현장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이 제도는 유지 된다고 하죠.
'기아 타이거즈' 역시 2025 시즌 개막전부터 디지털 취약계층을 위한 1루석 및 외야석 일부 현장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이 또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좌석 수를 조정할 계획입니다. 이러한 구단의 노력은 단순한 판매 채널 확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다시 야구장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환영의 제스처인 것이죠. 더 나아가 팬들 사이에서는 시니어석 도입 논의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장애인석처럼 일정 좌석을 시니어 팬들에게 우선 배정하거나, 예매 절차를 단순화한 별도 창구를 운영하자는 아이디어도 나오고 있습니다. 팬덤 사이에서도 이는 단순한 티켓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랜 시간 야구를 사랑해온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성숙한 팬덤 문화이죠.
프로야구 구단은 단순한 스포츠 조직이 아닙니다. 이들은 지역을 대표하고, 팬들의 감정을 움직이며, 특정 문화를 생산하는 브랜드입니다. 팬 경험은 이 브랜드의 핵심 자산이죠. 지금까지의 팬 마케팅은 Z세대 중심의 디지털 소비 트렌드에 맞춰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이는 분명 필요한 전략이었습니다. 그러나 브랜드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선 기존 팬덤의 이탈을 막는 일도 동시에 중요합니다. 시니어 팬은 단순히 나이 든 관중이 아닙니다. 이들은 팀의 역사와 함께한 산증인이며, 가족 단위의 야구 관람 문화를 전수해온 주체입니다. 그들의 기억, 이야기들은 구단의 '브랜드 내러티브(Brand Narrative)'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따라서 시니어 팬을 위한 배려는 단순한 복지 차원이 아니라, 브랜드 자산을 지키는 일이자 팬 커뮤니티의 다층성과 지속성을 확보하는 전략입니다. 특히 디지털 기반의 마케팅이 강해질수록, 아날로그적 접근이 오히려 브랜드의 따뜻함과 포용성을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야구는 세대를 아우르는 스포츠입니다. 그 안에는 어린이 팬의 첫 직관, 20대의 열광적 응원, 중년의 회고, 노년의 추억이 한데 어우러집니다. 프로야구 구단이 지역을 대표하는 진정한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는 이 다양한 팬 층을 모두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장 발권의 부활, 시니어석에 대한 논의, 티켓 예매 프로세스의 다층화 등은 단기적인 마케팅 수단이 아니라 장기적인 팬 관리의 시작입니다. 이는 브랜딩 전략 측면에서 단기적 유입과 장기적 충성을 균형 있게 다루는 구조로 이어집니다. 결국 지금의 프로야구 구단은 이 질문에 분명한 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구단 브랜드는 누구를 기억하고, 누구를 잊고 있는가?' 젊은 팬이 중요한 만큼 브랜드가 오래 가기 위해서는 그 역사와 함께 걸어온 팬들을 다시 야구장에 초대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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