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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보영 May 15. 2019

『책기둥』 문보영×김언 좌담

interview

   포지션 2018년 봄호 <이 계절의 첫> 

  
                       조금 일찍 도착한지도 몰라, 미래의 시기둥
                          『책기둥』(민음사, 2017)을 중심으로
   

  문보영×김언



김언(이하 김): 문보영 시인, 반갑습니다. 우선 축하부터 드립니다. 지난해 말 김수영문학상을 받으면서 첫 시집 『책기둥』을 냈습니다. 인터넷에서 수상 소감이 회자되는 걸 보았습니다. 저도 흥미롭게 읽었네요. 마지막에 이렇게 나와 있더군요. “사람들은 손잡이가 없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문으로 생각하지 않는데 시를 쓸 때만큼은 사람의 무릎이나 겨드랑이 아니면 허벅지에 난 점 따위에 달린 작은 손잡이가 보이며, 열릴 리 없지만 왠지 열고 싶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어쩌면 이 인터뷰도 ‘열릴 리 없지만 왠지 열고 싶다는 느낌’으로 한 시인의 세계에 접근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은 쉬운 것부터 열어보고 싶네요. 수상 소감과 별개로 첫 시집을 내고 나서의 소감은 또 어떤지 궁금합니다. 근황도 같이 알려주시면 좋겠어요.
   
문보영(이하 문): 시집이 나온 후 친구와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친구가 바닥에서 뭔가를 집으며 앞사람에게 “이거 놓고 가셨어요”라고 외치는 거예요. 그것은 좌석 아래 삐져나온 노란색 구명조끼였습니다. 다행히 제가 입을 틀어막았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진짜 그 사람이 떨어뜨린 구명조끼였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구명조끼를 소지하고 다니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잖아요. 어쨌든, 시집이 나와서 홀가분합니다. 아쉬움도 없고 후회도 없고 그냥 홀가분하기만 해요. 
   
김: 초반부터 문보영 시인다운 답변이네요. 의례적인 첫 인사가 될 수도 있는 말도 문 시인에게 가면 톡톡 튀는 이야기로 엮어지는 것 같아요. 실은 김수영문학상 시상식 때 문보영 시인의 소감을 들으면서, 아 전혀 다른 종의 시인이 나왔구나 싶었어요. 이전에 내가 알던 시인의 상(像)과도 다르고, 감수성도 다르고 정서도 다르고 무엇보다 말이 다른 시인이 나왔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네요. 약력을 보니 전공도 문창과나 국문과가 아니라 사범대 교육학과로 나와 있던데요, 어떻게 시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또 쓰게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문: 초등학생 때부터 일관되게 학교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교육학과에 진학해 교육부 장관이 되어 학교 교육을 개혁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교육학과를 가니 너무 지루했어요. 그래서 학교를 잘 안 나가다가, 우연히 국어교육학과 수업을 들으면서 문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처음 들은 수업이 오태환 시인의 소설 창작 수업이었는데, 종강 날까지 그분이 시인인지 몰랐어요. 누더기 모자를 쓴, 빈말 못 하는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그분의 수업이 참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도 안 웃고 저만 웃는 거예요. 종강 후 더 가르쳐 달라고 연락 드렸던 유일한 선생님입니다. 등단 전까지 삼 년 동안 어르신들과 함께 오태환 시인의 시 수업을 들었고 거기에서만 시를 보여주고 쓰고 했습니다.
   
김: 문학과 인연이 될 사람은 어떻게든 인연이 되나 봅니다. 거기다 시인이 강의하는 소설 창작 수업에서 인연이 시작됐다니, 소설 같은 서사를 껴안고 있는 문 시인의 시 세계와도 어쩐지 통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관련해서 질문을 이어갈게요. 등단작이 2016년 중앙신인문학상을 받은 「막판이 된다는 것」인데, 첫 시집에서 빠져 있습니다. 시집의 성격과 어긋나서 빠진 것일까요? 사소하지만 궁금해서 한번 질문을 던져봅니다. 사실 더 궁금한 것은, 첫 시집에 들어 있는 50편의 시 중에서 42편은 어느 지면에도 발표하지 않은 작품이라고 출판사 소개글에 나와 있던데요, 이 작품들은 데뷔하고 나서 다 쓰신 건가요? 그렇다면 정말 대단한 생산력인데요, 어떻게 이렇게 많은 작품을 쓸 수 있었을까요? 원래부터 다작인 편인지, 아니면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인지 궁금하네요.
   
문: 1인칭 화자가, 불행하다고 비명을 내지르다가 끝나는 시에 진력이 났던 것 같아요. 제 등단작은 자기 얘기밖에 안 하는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니, 제 시에게 미안하네요…. 저는 그냥 좀 웃고 싶었고 행복하고 싶었습니다. 더 이상 슬퍼서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길 바랐습니다. 등단하고 좀 헤맸어요. 한 삼사 개월은 재미없는 시를 썼고, 그래서 그 시들은 시집에 넣지 않았습니다. 등단하고 파일을 두 개 만들었어요. 시 파일과 딕싯(제가 좋아하는 게임 이름) 파일. 시스러운 건 시 파일에 넣어서 발표하고 딕싯 파일에는, 시인지 의심스러운데 혼자 은밀히 좋아하는 이상한 글을 넣고 발표는 안 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시 파일은 비고 딕싯 파일에만 글이 쌓였습니다. 작년 4월부터 9월까지 딕싯에 쓴 글을 모아서 투고했어요. 
저는 원래 시를 빨리 못 쓰고 많이도 못 쓰는데요, 대신 일기는 심각하게 많이 써요. 일기병에 걸렸나 싶을 정도로요. 그런데 작년에는 시와 일기의 경계가 많이 허물어졌던 시기여서, 일기를 쓰다가 시가 된 글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 이건 여담인데. 언젠가 친구에게서 김언 시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들은 적이 있어요. ‘시 백 편을 쓰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셨다고. 그런데 그 말이 묘하게 자꾸 떠올랐습니다. 한동안 일기장에 백,이라고 써놨었어요. 내가 쓰는 이런 글들이 시가 맞나, 시라고 우겨도 되나, 겁날 때,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일단 백 편 쓰고 생각하자,는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 제가 책임 못 질 말을 했었군요.(웃음) 혼자 외롭게 주문을 거는 방식으로 백 편만 쓰자, 백 편 쓰고 나서는 백 편만 더 쓰자, 그러면서 버텨내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뜻에서 그랬을 겁니다. 물론 문 시인에게는 정말로 좋은 일이 일어났네요. 책임 못 질 말을 한 주제에 괜히 뿌듯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집 얘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시집의 처음을 여는 시 「오리털파카신」을 읽으면서 시에 담긴 내용과 별개로 두 가지 의문이 들었어요. 하나는 현재형과 과거형으로 변주되며 두 차례 등장하는 “(이라)고 시인은 쓴다/썼다”는 구절에 대해서예요. 만약 저 구절이 없다면, 없는 대로도 완성된 시라고도 할 수 있는데, 왜 시인은 이런 식으로 메타적인 기법을 사용했을까? 이미 완성됐다고 봐도 무방한 시의 외형을 한 번 더 껴안듯이 처리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이 따라붙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식의 메타적인 진술이 시집 곳곳에서 허다하게 등장하고 있어서 꼭 물어보고 싶었네요. 
   

(시 <오리털파카신> )


신이 거대한 오리털 파카를 입고 있다 인간은 오리털 파카에 갇힌 무수한 오리털들, 이라고 시인은 쓴다 이따금 오리털이 삐져나오면 신은 삐져나온 오리털을 무신경하게 뽑아 버린다 사람들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오리털 하나가 뽑혔다 그 사람이 죽었다 오리털 하나가 뽑혔다 그 사람이 세상을 떴다 오리털 하나가 뽑혔다 그 사람의 숨통이 끊겼다 오리털 하나가 뽑혔다 그 사람이 사라졌다
죽음 이후에는 천국도 지옥도 없으며 천사와 악마도 없고 단지 한 가닥의 오리털이 허공에서 미묘하게 흔들리다 바닥에 내려앉는다, 고 시인은 썼다
- 「오리털파카신」 전문
  
문: 예전에 어느 문예지에 시를 발표할 때 시작 노트를 함께 첨부한 적이 있어요. 그때, 시작 노트에 썼던 글이에요. 그래서 그게… 시작 노트여야 하니까 그렇게 썼던 것 같아요. 그리고 누가, “너는 등단작보다 등단 소감이 좋고, 시보다 시작 노트가 더 좋으니까 그냥 등단 소감을, 시작 노트를 시라고 우겨보는 건 어때”라고 악담을 했고, 그 말이 좋았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고 있는 쪽으로 걸어가게 용기를 주었던 것 같아요. 사실 제가 메타를 자주 사용하는지는 잘 몰랐습니다. 문창과에서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너네는 웬만하면 메타하지 마라, 그냥 하지 마라’라고 말한다고 누가 그러더라고요. 사람들이 메타시를 많이 쓰는지도 잘 몰랐고, 웬만하면 안 하려고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냥, 도서관에 있으니까 눈에 뵈는 게 책밖에 없고, 책을 읽는 인간들밖에 없어서 책에 관해 썼던 것 같아요. 아마, 이걸 시집 한 권 분량으로 써내야 할 만큼 좋아했나 봐요. 이제 메타시는 잘 안 쓸 것 같아요. 
   
김: 쓰는 입장에서 시에 대한 시, 메타시는 대체로 할 말이 떨어질 때 나타나는 증상이라서 그런 주문이 나오는 걸 거예요. 특히나 습작기 때 나오는 메타시는 처음부터 ‘나는 시 말고는 할 말이 없습니다’처럼 들려서 저도 그런 주문을 자주 하는데요, 문 시인의 경우에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할 말이 떨어져서 나오는 방식이 아니라 다음 말을 끌어내거나 다른 장면으로 슬쩍 옮겨가기 위한 화법으로 읽혔어요. 그래서 단순히 메타시에 가둬놓고 읽어서는 안 되는 작품일 겁니다.
「오리털파카신」에서 또 하나 궁금했던 것은 바로 ‘신’입니다. 이건 문보영 시인뿐만 아니라 2010년대에 등장한 시인들에게 새삼 묻고 싶은 것이기도 합니다. 황인찬, 송승언, 안미린, 신철규 등등 많은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신’인데요, 저마다 시에 ‘신’을 대동하는 이유와 쓰임새가 다르겠지만, 그럼에도 왜 하필이면 ‘신’이었을까? 바로 앞 세대, 그러니까 2000년대에 등장한 시인들의 시에선 좀처럼 발견되지 않던 저 단어가 갑작스레 무더기로 등장한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문보영 시인의 시에서도 ‘신’은 첫 시뿐만 아니라 다른 시편들에서도 거듭 등장하고 있어 한번 질문을 던져봅니다. 문보영 시인의 시에서 ‘신’은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봐야 할까요? 그리고 2010년대 시인들의 시에 자주 출몰하는 ‘신’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신지요?
   
문: 오, 2010년대 시인들이 신을 자주 호명하는지 몰랐어요. 그렇군요…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신이 아니라 강아지나 팅커벨 아니면 너구리일 수도 있었을 텐데. 신이 만만했나 봐요. 아니면 신에게 불만이 많았거나. 너무 무서워해서 친근해지려고 노력했던 것일 수도.
   
김: ‘신’에 대해서는 저도 좀 더 고민을 해봐야겠네요. 다만 2010년대에 등장한 다른 시인들은 ‘신’에 대해 저마다 다르면서도, 문보영 시인과는 조금 다른 지점에서 한데 묶어지는 의견을 내놓지 않을까 싶네요. 아마도 “강아지나 팅커벨 아니면 너구리일 수도 있었을 텐데”라는 말은 나오지 않을 듯해요. 현실에 대한 부채감이나 절박함에서 호출하는 신이 대부분인 가운데, 문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신은 훨씬 슬림해지고 가벼워진 느낌이 들어요. 거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신 같아요. 이건 동시대의 젊은 시인들과 구분되는 중요한 지점이라는 생각이 퍼뜩 듭니다. 시를 이끌어가는 화법이나 시에 녹아 있는 정서도 2010년대 등장한 일군의 시인들과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어쩌면 2020년대 시의 윤곽을 『책기둥』에서 미리 맛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만큼 2010년대 시와 이어지면서도 결별하는 지점이 분명히 보이는 시집이라는 판단을 조금 이르게 해봅니다. 어떠세요? 문보영 시인은 동시대 젊은 시인들의 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또 어떤 점에서 자신의 시가 그들과 다른 위치에 놓이는지 생각해보셨는지요?
   
문: 예전에 꿈을 꿨는데요. 버스 정류장 앞에 여고생 둘이 서 있었어요. 저는 목발을 짚고 있었고요 담배를 피우고 있었어요. 정류장 전광판에 박보영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여고생 둘이 박보영 사진을 보며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면서 생각했습니다. 박보영 같은 시를 쓰자…라고요. 박보영은 다정한데 왠지 강해 보입니다. 아이유도 그렇고. 저도 강하고 싶어요. 그리고 동시에 귀엽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귀엽고 강하고 다정하고 괴팍하고 싶은 것 같아요. 제가 귀여운지는 모르겠지만 귀엽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점이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어요. 
   
김: 박보영이나 아이유 같은 시의 화자라면 분명 특이하고 매력적일 겁니다. 더 귀엽고 강하게, 더 강하고 귀엽게 나오는 목소리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더 많이 생겨나지 않을까 싶네요. 실은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책기둥』에 대해 독자들이 짤막하게 남겨놓은 감상평을 훑어봤어요. 신기방기해할 정도로 환호하는 목소리도 있고, 너무 말이 많다면서 싫어하는 목소리도 간간이 눈에 띄었어요.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어떤 시집이든 읽는 사람의 감식안과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라지니까요. 그러나 적어도 『책기둥』에 대해서는 독자의 호불호와 상관없이 시집을 떠받치고 있는 엄청난 에너지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그 에너지 때문에라도 아주 긴 호흡의 시가 지치지 않고 나올 수 있었을 거라고 또 짐작합니다. 
제 취향과 감식안에서는 작품의 길이와 무관하게, 그리고 편편의 시적 성취와 무관하게 “책장을 넘기는 것은 관 뚜껑을 여는 행위이며/ 관 뚜껑을 열 때마다/ 누워 있는 자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한다”(「그림책의 두 가지 색」), “해는 밝았다/ 시체는 심장이 썩은 지 오래지만 감동하는 사람은 없었다”(「공동창작의 시」), “그들은 책을 덮고 집으로 갔다/ 집은 언제 제정신으로 돌아가는가?”(「그녀들」) 같은 대목들에서 매력을 느꼈습니다. 매력적이면서 또 인상적인 저 대목들에서 문보영의 시에 녹아 있는 에너지를 더 신뢰할 수 있고 더 응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건 제 관점에서 본 매력적인 문장이고, 문보영 시인의 관점에서는 또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습니까? 문보영 시인이 생각하기에 매력적인 문장, 인상적인 문장, 나아가 시가 되는 문장이란 어떤 것일까요? 좀 더 난감한 질문을 드리자면, 문보영 시인이 생각하는 시와 시 아닌 것의 차이는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과연 무엇이 시고 무엇이 시가 아닌 걸까요? 
   
문: 감사합니다. 시가 되는 문장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문장으로 승부하는 시에 조금 흥미가 동난 것 같아요. 등단하기 전까지 그런 시를 주로 썼고 어느 순간 지친 것 같아요. 무엇보다 저보다 다른 시인들이 더 잘하는 것 같고, 제가 그걸 하기엔 너무 소설을 좋아해요. 그런데 소설을 쓰는 건 안 좋아하고요. 무엇이 시이고 시가 아닌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작년부터인가, 시를 읽을 때, 별로 안 좋은 시를 읽었을 때 제 반응은 ‘이건 시인데?’였고, 진짜 좋아하는 시를 만났을 때는 ‘오, 이건 시가 아니잖아?’였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시한테 너무 핍박받아서 넌더리가 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인데, 시가 아닌 요소로 더 많이 구성된 시를 좋아한 것 같습니다. 괴팍한, 좀 짜증을 부리는 시들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뭐가 시가 아닌지는 모르겠고 사실 모르고 싶기도 한데요, 어쨌든, 시가 아닌 쪽으로 바운더리를 넓혀가는 시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김: 시가 아닌 쪽으로 바운더리를 넓혀가는 시를 쓰고 싶다는 얘기로도 들립니다. 저로서는 반가운 말이고, 그래서 더 응원하고 싶고, 더 기대하게 만듭니다. 시 「프로타주」에서 살바도르 달리의 일생을 “1904년 출생 시도/ 1921년 출생 시도/ 1947년 출생 시도/ 1952년 출생 시도/ 1977년 출생 시도”로 요약한 것처럼, 계속해서 출생을 시도하는 시, 이제까지의 시와는 결별하듯이 다시 태어나는 시, 어제까지 시가 아니었던 것을 시로 넓혀가는 시, 이런 시들을 계속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이어서 조금 엉뚱한 질문을 해봅니다. 시집에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하는 젊은 시인 앙뚜완, 지말, 스트라인스의 운명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번 시집을 끝으로 은퇴하는 건지요? 혹은 이다음 시집에서 이름을 바꾼 채로라도 재등장하는 걸까요? 
   
문: 안 나올 것 같아요. 그 세 분이 부디 취업하길 빕니다. 제가 시를 안 쓴 지 한 달이 되어가고 있어요. 음. 고의로 안 쓰는 것이기도 하고, 시가 쓰기 싫으니까 안 쓰는 것이기도 하고, 안 써져서 못 쓰는 것이기도 하고 시를 참는 것이기도 한데요. 시만 안 써도 삶의 질이 이렇게 높아지는데…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곧 다시 써야겠죠…) 
   
김: 그냥 ‘딕싯2’ 파일을 만들면 어떨까 싶네요. 그러면 써지지 않을까요.(웃음) 앙뚜완, 지말, 스트라인스처럼 무운을 빌며 잘 보내주기 전에, 이번 시집에서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는 시 3편을 꼽는다면 어떤 작품들일까요? 이유도 같이 얘기해주세요.
   
문: 「뇌와 나」, 「파리의 가능한 여름」, 「과학의 법칙」.
「뇌와 나」는 우선, 수록된 시들 중, 가장 길어서 아무도 안 읽을 거고, 낭독회에서 절대 낭독도 할 수 없으니까 저라도 많이 애정해야겠다는 생각이에요. 그리고 실제로 쓰면서도 즐거웠습니다. 사람들이 자꾸 저를 떠나는데, 떠날 때마다 소파에 뇌를 두고 떠나요. 그래서 저는 그 뇌를 헬멧처럼 쓰고 상습적으로 추억합니다. 추억하다 과로사하고요. 사람들에게 받은 사랑을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로 날려 먹고 그 상처를 다시 사람에게 받은 사랑으로 갚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파리의 가능한 여름」은 아까 언급된 세 명의 시인이 처음 나오는 시에요. 그래서 정이 많이 들어버렸고요. ‘파리’는 똥파리인데 사람들이 프랑스 파리로 착각해서 좋은 것 같아요.
「과학의 법칙」. 이 시 때문에 사람들이 제가 이과생이거나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오해하는 것 같아요. 시집에 수학, 과학 얘기가 자주 나오는데, 제가 과학과 수학을 소재로 시를 쓸 수 있었던 건, 비문학 서적을 읽을 때 이해를 잘 못해서, 제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책을 읽을 때보다 오독이 원활하달까?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딴생각을 하다가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시 <뇌와 나> 일부)


애인이 떠날 때 뇌를 두고 떠났다 갈아 마실 수도 있겠다 인간의 뇌를 살펴보고 만져 본다 노랑 가발을 씌워 보고 눈을 감겨 보고 따듯한 물에 담가 본다 손가락으로 꾹 누른다
  
뇌는 통증을 느끼지 않으므로 머리를 열고 수술을 받으며 환자는 베토벤 「Symphony No. 9」이나 라흐마니노프 「Prelude Op. No. 5」를 들을 수 있으며 외과의와 뇌의 출혈 정도와 수술 실패 가능성에 관한 긴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뇌는 인간다운 활동을 가능하게 하니까
  
뇌는 태연히 거실의 가죽 소파에 앉아 있다 그것은 난생처음 푹신한 것에 앉아 본다 콜리플라워 같은 얼굴로 창문을 바라본다

*
   
뇌는 마지막 기억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놀이동산
회전목마가 돌아간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손을 흔든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녀도 울타리 바깥에서 손을
흔든다 모두 괴이한 물체를 들고 있다
원통으로 된
투명 막대기 끝
손바닥이 달린
장난감
원통은 알록달록한 눈깔사탕으로 채워져 있다
손이 있으면서 손을 사서 기어이
손을 흔드는 사람들 그녀도
손을 흔드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든다 앞머리가 바람에
넘어가면 보이는
그녀의 이마와 이마 위의
요점 없는 주름살 하나를 그녀는
떠올린다
뇌가 고통을 느끼지 않는 말이 사실일까? 
- 「뇌와 나」부분

  
김: 거실 소파에 뇌가 앉아 있는 모습이 압권인 「뇌와 나」는 저도 퍽 흥미롭게 읽었어요. 시집에 대해서 신기방기해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아마도 저렇게 턱 하니 말도 안 되는 장면을 태연하게 들려주는 입담에 넘어간 사람들이지 않을까 싶네요. 그중 1인의 말이었습니다. 『책기둥』에 대해서 누군가는 사석에서 또 이런 말을 하더군요. 자신은 전공이 철학인데, 이 시집에 담긴 이상하고도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논리가 참 재밌었다고. 아마도 「과학의 법칙」이나 「수학의 법칙」 같은 시들에서 그런 논리를 느꼈을 텐데, 전공이 철학이든 무엇이든 이 시집을 읽은 사람들 중 또 몇몇은 이 시집에 힘을 얻어서 시를 쓰고 문학을 해나갈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시집에서 영양을 얻고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말일 텐데요, 역으로 문보영 시인에게도 자신의 시에 영향을 준 시인이 있을까요? 꼭 시인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여타 장르의 작가나 예술가를 말씀해주셔도 좋습니다. 저는 이 질문을 준비하면서 내심 외국 작가로는 카프카, 한국에서는 박상순 시인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혹시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면 착각이라고 바로 얘기해주세요.
   
문: 눈썰미 있으시네요. 카프카도 좋아하고 박상순 시인도 무척 좋아합니다. 김언 시인도 좋아합니다! 『소설을 쓰자』라는 시집은 제목이 너무 탐나요. 제 시집 제목으로도 좋지 않나요? 그래서 시집을 쇠사슬로 묶어 지하실 창고에 넣은 뒤 개와 바람으로 그 입구를 지키게… 하지는 않았고요. 사실 저는 거의 모든 시인에게서 영향을 받습니다. 저는 정말 영향을 많이 받아요. 저는 거머리 같은 사람입니다. 제가 읽고 나면 책이 저에게서 피 빨린 것 같아요. 그래놓고 시를 잘 안 읽는 것 같기도 해요. 시를 정말 안 읽어요. 그러니까 재작년까지 시를 미친 듯이 읽었는데 작년에는 세 권도 안 읽은 것 같아요. 거의 비문학 서적과 소설을 읽다가 혹은 일기를 쓰다가 시를 씁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 엠마뉘엘 카레르, 플래너리 오코너, 엘프리데 옐리네크, 베케트 등등. 
   
김: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 자신에게 영향을 준 시인이 누구냐? 이런 질문은, 받는 입장에서는 정말 우문에 가까운 것이라서 피하고 싶은 질문인데, 막상 질문을 하는 입장이 되니 또 달라지네요. 우문임에도 문보영 시인이 애정하는 시인/작가들의 목록을 궁금한 사람들이 꼭 있을 듯해서 한번 질러봤습니다.(웃음) 읽은 책들마다 본인에게 피 빨린 것 같다고 하셨는데, 정작 그 피는 이번 시집을 비롯해서 앞으로의 시편들 모두에 녹아들겠지요. 이건 누구 피고 저건 누구 피라고 구분할 것도 없이 엄청나게 긴 호흡 속에 하나의 피로 녹아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피가 나와서 굳으면 그대로 ‘책기둥’을 쌓는 것처럼 높고도 깊은 시 세계로 나아가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같이 해봅니다. 질문을 조금 옮겨볼게요. 혹시 시 외에 따로 관심이나 흥미를 두고 있는 분야가 있는지요? 꼭 진지한 것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가령, 익히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는 ‘피자’도 그중 하나가 되겠네요.
   
문: 호호. 피자에 환장합니다. 제 방에는 피자 가방, 피자 공책, 피자 쿠션 등등 아주 많습니다. 고시원 살 때 피자를 자주 시켜 먹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다른 것은 기다려도 절대 오지 않는데 피자는 주문하면 정말 오잖아요. 나에게 제발 좀 와줘, 라는 말에 피자는 응답합니다. 다른 것들은 기다리면 기다린다는 이유로 안 오는데 피자는 기다렸을 때 정말 와요. 그러니까 세상에서 가장 마음씨 따뜻한 것은 피자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 외에, 제가 흥미를 두는 분야는 우정인 것 같아요. 연애도 좋은데, 우정이 더 중요해요. 친구를 심각하게 좋아합니다. 인터뷰할 때마다 친구 얘기를 너무 많이 해서 기자들이 친구가 많으신가 봐요? 라고 물었는데, 너무 자신 있게, ‘네, 한 명이나 있어요’라고 대답했다가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 외에 관심 있는 건 춤입니다. 시는 아무 생각도 한다,에 가깝다면 춤은 아무 생각도 안 한다,여서 시를 쓰면 꼭 춤을 춰야 균형이 맞는 것 같습니다.
   
김: 아무 생각을 사이에 두고 시와 춤이 만나고 헤어지는 게 재밌네요. 춤은 아직 못 봤지만, 시는 앞으로도 계속 볼 것이므로 마지막으로 질문 드려요. 앞으로 어떤 시를 쓰고 싶은지요? 혹은 어떤 문학을, 어떤 예술을 하고 싶은지요?
   
문: 르포물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좀 공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소설만큼 바글거리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페렉의 『인생사용법』이라는 소설을 좋아하는데, 시를 쓸 때 그런 시를 쓴다면 어떤 시가 나올까 궁금해요. 그러니까 시집 한 권이 아파트이고 그 아파트에 사는 인간들에 대해 쓰는 시…… 오, 방금 생각해 봤는데 정말 별로일 것 같네요. 어떤 문학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다시 시가 쓰고 싶었으면 좋겠고요, 사람들이 읽다가 킥킥 웃을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김: 첫 시집에서도 킥킥 웃으면서 시를 읽은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저처럼 쓸데없이 엄숙한 문화에 한 발이라도 걸쳐져 있는 세대 말고 문보영 시인과 같은 세대로 옮겨가서는 훨씬 더 많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시로도, 시에 대한 얘기로도 제가 미처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경험하고 짚어보게 해주셔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어요. 시 아닌 것의 바운더리가 찢어질 정도로 넓어지는 시, 계속 기대하고 있을게요.
   
문: 감사합니다. 다들 밤에 잠을 잘 잤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아이유가 한 말입니다. 다음에 또 뵈어요! 따뜻한 아침을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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