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보영 Dec 02. 2020

나를 인용하는 너

                                                                                                                                                                                                                                                                                                     

일기를 쓸까. 


오늘은 내 친구 성실한 이해자와 전화 스터디를 했다. (성실한 이해자는 친구의 이름이다) 몇 달 전에 나는 성실한 이해자에게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작품의 한 구절을 읽어주었다. 친구는 그 책을 구해서 읽은 모양이다. 그녀의 블로그에 ‘친구가 읽어준 그 구절을 찾으며 책을 읽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마침 나도 비슷한 짓을 하고 있었다. 몇 주 전, 호저가 크리스 크라우스의 소설 <아이 러브 딕>을 추천해 주었다. 재미있어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그런데 호저가 인스타에 <아이 러브 딕>의 한 구절을 올렸는데, 나는 그 구절을 읽은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그 구절을 찾기 위해 <아이 러브 딕>을 다시 폈다. 그때 마침 성실한 이해자의 블로그 일기를 읽었던 참이었다. 우리는 책에서 서로를 찾고 있구나 싶었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책을 내가 쓴 것도 아니고, 아이 러브 딕을 호저가 쓴 것도 아닌데, 성실한 이해자는 그 책에서 나를 찾고 있었고, 나는 아이 러브 딕에서 호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호저와 나는 이 책을 두 번 읽고 화요일 밤에 전화 스터디를 하기로 했다. 전화를 하기 1시간 전까지 나는 책의 2/3를 다시 읽었는데 그 구절을 찾지 못했고, 그래서 왠지 호저를 만날 자격을 상실해버렸다고 느꼈다. 그런데 통화 직전 나는 265페이지에서 그 구절을 발견했다. 그런데 웃긴 점은 내가 그 부분에 이미 밑줄을 그어놓았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더 웃긴 건 그 문장은 크리스 크라우스의 문장도 아니었다. 그녀가 인용한 다른 누군가의 문장이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인용 같았고, 이 상황과 우리의 대화, 그리고 우리의 영혼까지도 인용이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는데, 그러니까 나는 크리스 크라우드가 인용한 문장을 인용한 호저의 인스타를 이 글에 인용함으로써 호저의 영혼과 내 영혼을 이 글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반드시 두 번 완독한 뒤에 전화를 걸겠다고 호저에게 약속했지만, 호저가 인용했던 그 문장을 발견하자마자 왠지 책을 다 읽어버린 기분이 들었고, 남은 부분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따라서 책을 덮었고, 호저에게 전화를 걸었으며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호저가 인용했던, 크리스가 인용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파격적으로 솔직해지는 건 자신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도 내어주는 겁니다. 정말 확실하게 솔직해지려면 거의 예언자가 되어야 하죠. 질서를 뒤엎어야 해요.” (데이비드 래트레이가 편집자 켄 조던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

크리스 크라우드 <아이 러브 딕>, 박아람 옮김, 2019, 책 읽는 수요일, p. 265


이 책에 ‘솔직함’이라는 단어는 한 번 더 등장한다. 


(“이만큼의 솔직함은 이만큼 질서를 위협한다.” 예전에 데이비드 래트레이가 르네 크러벨에 대해 이렇게 썼어요. 난 그 정도까지 솔직해지려 하고 있었죠.) 

위의 책, p. 254
























작가의 이전글 새로운 책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