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 있어서 좋아요' 라는 말
나보다 한 살 어린 J는 내게 이런 고백을 했다.
“언니는 선이 있어서 좋아요.”
선이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이고, 그래서 좋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녀는 여러 사람이 있을 땐 말하는 것보다 듣는 역할을 주로 한다. 어떤 날은 네 명이 카페에 앉아 두 시간을 대화해도 그녀의 발화량은 전체의 5%도 안 될 정도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말을 충분히 기꺼이 들어준다. 가끔 말로 상처받고 또 상처 주기도 하는 나로서는 배울 점이 많은 친구다. 그런 친구가 내게 선이 있어서 좋다고 했다. 내가 해석하기로는 불쑥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관계에서 예의를 지키며 그렇다고 까칠하지 않은 적당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녀와 나의 사회적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말이 굉장히 익숙해졌다. 전염병의 확산을 막거나 늦추기 위해서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자는 감염 통제 조치가 캠페인화되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라는 물리적인 거리 개념이다. 그이전에 통용됐던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는 사회학과 심리학에서 사람들이 서로 느끼는 심리적 친밀감과 거리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즉 내가 다른 사람이나 집단과 얼마나 가깝거나 멀다고 느끼는지를 나타내는 심리적 거리이다.
사람 관계에서 ‘선이 있다’는 것은 이 심리적 거리의 적정선을 알고 있고,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마다 규정한 선의 범위는 분명히 다르다. 누군가는 거리감의 거의 없이 금방 친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이 거리가 굉장히 넓어서 천천히 두고 보며 친해지거나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쿨하게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니 서로의 심리적 거리를 구분 짓는 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회적 기술이 될 것이다.
J가 말한 ‘선이 있다’는 것은 곧 ‘선을 지킨다’를 의미한다. 그것은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친하지도 않은데 꼬치꼬치 사생활을 묻거나 참견하려고 하는 것, 친하다고 생각해서 무례하게 부탁을 하거나 떠넘기듯 당연하게 일을 시키는 것, 자기보다 한 살이라도 어리면 무조건 반말하면서 동생 대하듯 하는 것,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하는 것 등. 그녀가 힘들어하는 것들은 대부분이 사람 관계에서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였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그녀가 내게 ‘선을 지켜서 좋다.’고 한 말에는 '무례하지 않아서 좋다.'는 말이 내포되어 있었다.
벌써 그녀와 알고 지낸 지 4년이 되어 이젠 그녀와 나 사이에 사회적 거리도 제법 가까워졌다. 그래도 그녀가 수줍어하며 나와 친해지고 싶었다고 고백했던 그날을 종종 떠올린다. 함께 한 시간만큼 더 가까워진 만큼 말로 상처를 준 적은 없는지 곱씹어본다. 사회적 거리가 조금은 가까워졌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적당한 선을 지키고 있는지 돌이켜본다.
잃고 싶지 않은 친구가 되었기에 더 노력해야지. 가까워진 거리만큼 무례하지 않게 예의를 다해야 한다. 나이와 상관없이 배울 것이 많은 그녀와 ‘더 친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존중하자는 다짐을 다시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