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없이도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책방이 있다. 우연히 푸근한 인상의 책방지기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뒤, 편도 30분이 걸리는 책방에 매주 수업을 들으러 갔다. 성인들이 모여 그림책을 읽고 질문하고 성찰하는 수업이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멈추어 사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그 에너지가 참 좋았다. 나를 찾아가는 질문들을 꺼내 놓고, 우물 밖 세상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서로 다른 색깔 속에서 결국 나의 생각과 기준, 가치관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꼈다. 나는 '명예 실장'이라는 타이틀까지 얻을 정도로 그 모임에 애정을 가지고 참여했다.
하지만 올해는 그 수업에 등록하지 않았다. 더 배울 게 없어서가 아니다. 나아가고자 하는 나의 에너지, 집중하고 싶은 시간 속으로 어느 순간부터 한 사람이 자꾸 침입해 들어왔다. 처음엔 이해하려 했다.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고, 그것을 꺼내는 일은 용기 있는 행위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H는 첫 만남부터 가정폭력을 경험한 유년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며 울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오히려 부모에 대한 원망이 커졌다고 했다. 그 고통을 말로 꺼내기까지 그녀는 얼마나 많은 내면의 싸움을 했을까. 뉴스나 책에서만 보던 생생한 증언을 바로 앞에서 듣는 순간, 나는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 기름도 없이 올린 달걀처럼 심장이 쪼그라들고 눌어붙는 통증을 느꼈다.
상상력과 공감 능력이 지나친 나는 예측하지 못한 슬픔 앞에 화상을 입은 듯한 아픔을 느끼곤 한다. 그녀는 오랜 상담과 다정한 남편의 도움으로 회복 중이라 했고, 그 애씀은 충분히 기특했다. 하지만 그녀는 매 수업마다 어떤 책을 읽든 여전히 그 시절의 상처들을 꺼냈다. 몇 번을 반복해 들어도 그녀는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그녀가 쓴 글은 늘 같은 장면에 머물러 있었다. 가장 약하고 작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피해자로서의 자신. 그 시절의 고통과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를 되새기며, 너무 많은 에너지를 고백에 쏟고 있었다. 물론 알고 있다. 상처는 꺼내야 산다. 곪은 상처는 드러내야 새 살이 돋는다.
나 역시 그런 적이 있다. 한때 나도 내 상처를 글로 꺼내고 싶었다. 정확히는, 꺼내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 있었고, 그 분노와 상실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그런 글은 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엄청난 열의로 가득차 새벽까지 키보드를 두들길 수 있었다. 감정이 격해진 채 써 내려간 글을 모아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는데, 탈락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는 벅차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돌이켜보면 나 역시 H처럼 고백을 통해 응답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타인에게 흘러넘치는 감정은, 때로 또 다른 상처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지금은 알고 있다.
심리학에서는 자신을 드러내는 자기 개방(Self-disclosure)이 치유와 회복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감정과 기억을 말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낮아지고, 타인과의 신뢰를 쌓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관계 형성이 되지 않은 상대에게 과도한 정보를 너무 이르게 공유하면 부정적 반응에 노출되기 쉽다. 자기 고백은 용기이지만, 듣는 사람 또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종종 간과하게 된다.
그녀는 위로가 필요했을까? "당신은 잘못한 게 없다", "당신도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싶었을까? 그런 말들은 수업 내내 여러 사람들로부터 충분히 건네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 어떤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그저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말하는 어린아이처럼, 과거 속에 머물며 상처를 끊임없이 확인하려는 듯했다. 그녀의 고백이 반복될수록 나는 점점 지쳐갔다. 생각을 연결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던 시간은 점점 괴로워졌고, 결국 나는 그 수업을 떠났다.
수업엔 참여하지 않지만, 여전히 그 책방은 내게 편안한 곳이다. 얼마 전, 책방지기 선생님이 그녀의 그림책을 보여주었다. 미술을 전공했다는 그녀의 재능이 빛나는 책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그림책은 말하고 있었다. “나 아직 아파요. 정말 많이 아파요.”
아직도 그녀는 상처 고백 중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더 이상 듣지 않기로 했다. 그녀의 아픔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평온을 지키기 위해서다. 누군가의 고백이 위로가 되려면, 말이 닿을 수 있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듣는 이의 준비가 필요하다.
나는 여전히 그녀의 회복을 응원한다. 다만 그녀의 성장 고백이 너무 길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녀의 고백이 멈추기를 바라기보단, 그녀가 고백 없이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스스로 느끼게 되길 바란다. 내일을 위한 질문으로 오늘을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