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 나를 맑게 바라보는 글쓰기
자주 가는 동네책방에서 동시 쓰기 수업이 열렸다. 동시 작가님과 4주동안 동시 세 편을 쓰는 과정이었다. 사실 동시를 써 보겠다는 마음 보다는, 참여자가 너무 없어서 책방 사장님이 곤란하시지 않을까 하는 오지랖에 신청했다. 나의 우려와는 달리 40대이면서 대부분 학부모인 사람들이 열댓 명이나 모였다. 과정에 대한 기대보다 나는 동시를 쓰겠다고 신청해서 온 그들의 이유가 더 궁금했다.
동시 쓰기 과정의 주제는 [나의 이야기를 너에게 쓰다] 였다. 내 자녀(너)에게 해 주고 싶은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동시로 쓰는 것이다. 기억에 남는 '라떼는 말이야' 에피소드, 내 아이에게 얘기해 주고픈 나만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위해 추억들을 소환해야 했다.
제일 먼저 예닐곱살 때 여름이면 가족 나들이로 강가에 가 종일 다슬기를 잡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빠와 고사리를 따겠다며 뒷산을 헤집고 다녔던 일, 학교 운동장에서 땅따먹기 하면서 세상을 다 가진 듯했던 기억, 친구네 집에 가겠다고 한 시간 넘는 길을 걸어서 갔던 일도 떠올랐다.
기억을 소환해 낼 수록 생각지 못한 느낌이 찾아왔다. 동시를 쓰려고 보니 내게 즐거운 기억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래서 신이 나 정말 오랜만에 동시를 썼다. 다음은 내가 세 편 중 가장 처음 쓴 것이기도 하고, 애정을 듬뿍 담아 합평도 여러번, 퇴고도 여러번 한 작품이다.
단감나무 땡감나무
둥글 납작 찐빵같이 생긴 감이 조랑조랑
저건 보나 마나 땡감이다
이것도 땡감 저것도 땡감
땡땡땡! 입으로 내는 실로폰 소리
길쭉하고 아빠 주먹만 한 감이 주렁주렁
이건 보나 마나 단감이다
"아빠,
단감 하나만 따 주세요."
아빠는 손을 쭉 뻗었다가
이내 나무를 덥석 껴안는다
맞은편 정미소 아저씨 외치는 소리
"그거 땡감이에요!"
나무 위 아빠가 되받아치는 소리
"우리 딸이 단감이래요!"
내 손에 들린 감 한 알
옷소매에 슥슥 문질러 한 입 콱 깨무니
땡땡땡! 입 안에서 번개가 친다.
단감나무 땡감나무
아빠는 정말 몰랐을까?
나 혼자 감탄했다. 열 살 때 돌아가신 아빠와의 몇 안 남은 추억이다. 딱 봐도 땡감이었을, 그러나 6살 딸이 단감이라고 우기는 것을 곧이곧대로 듣고 기꺼이 나무에 올라 따 주었던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11살 내 딸에게 이 시를 들려줬다. '엄마가 동시를 썼어. 한번 들어봐~" 나 혼자 만족감 200% 충전한 상태에서 아이에게 낭송했다.
아이의 한마디 평은 굉장히 올곧았다. 내용이 이해도 되고 머릿속으로 상황이 그려지기도 하고 좋은데, 동시가 아니라 시 같다고 했다. 아주 잠깐 욱하는 감정이 눈빛을 스쳤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부분이 구체적으로 동시가 아니라 시 같은지를 물으려다가 다행히 입을 다물었다. 아이가 동시 같지 않다면 아닌 거겠지.
이 동시는 나에게 쓴 것인가 내 아이에게 쓴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나를 위해 썼구나. 내가 아빠를 추억하고 나를 다독이려고, 나 보라고 쓴 시구나. 이렇게 아빠처럼 나도 아이의 말을 먼저 믿어줘야겠구나, 자녀교육 바이블의 한 챕터를 시에 옮겼구나. 마흔이 넘어 두 아이를 키운 엄마로서 그 사건을 새로이 바라본 의미와 성찰을 가득 담아 시를 썼다. "어른이 어린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만 가득 담았던 것이다. '들려주려는' 목적의식 부터가 잘못됐다.
동시를 쓰면서 동시 쓰는 법에 대한 책을 찾는 것 대신에 김소영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라는 에세이를 읽었다.
어린이의 직관은 무엇을 꿰뚫어 보는 신통한 능력이 아니라, 있는 것을 그대로 보는 힘이다.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중
있는 것을 그대로 보는 어린이가 되기로 했다. 어린이의 생각과 감정으로 그 순간에 있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떠오르는 기억 속의 한 장면을 가져와 동시를 썼다.
아니래요
우리 집 담벼락에 기대 있는 자두나무
우리 것이 아니래요
내가 인사도 해주고
잘 자라라 노래도 불러줬는데
가장 탐스럽고 예쁜 한 알
다 익으면 제일 먼저 따야지 했는데
엄마가 따먹으면 안 된대요
우리 나무가 아니래요
내가 맛있게 키웠는데
왜 안 되죠?
먼저 동시 수업에서 낭송을 했더니 다들 빵 터졌다. 정말 아이의 마음이 느껴진다며 좋아하셨다. 용기를 얻어 집에 돌아와 아이를 붙잡고 다른 동시를 썼으니 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는 엄마의 눈치를 보는지 자세를 고쳐 앉고 제법 진지하게 들을 자세를 취했다.
동시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를 물었다. 아이의 대답은 지극히 단순했다. "재미있어!" 웃긴 것도 재미있는 것이지만, 의미가 있는 것도 재미있는 것이라는 연설을 하려다가 입에 지퍼를 잠갔다. 그 웃긴 것, 의미 있는 것도 지극히 어른의 관점일 테니까.
아이의 순간에 머무르는 동시 vs 사유와 해석을 담는 시
동시는 그 순간에 머무른다. 기억의 그 장면 속에서 그때의 어린아이가 되어 느끼는 감정, 생각을 고스란히 옮겨온다. 그러니 표현이 쉬울 수밖에 없고 종횡무진 앞뒤가 재미있는 변주곡이 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고스란히 그 생각과 마음이 느껴진다.
시는 그 시공간을 지나온 사람이 멀찍이 떨어져서 해석하고 의미를 가득 담는다.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해석이나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는 후회, '앞으로 이래야지'라는 의지마저 꾹꾹 눌러 담는다. 모든 서사를 시 한 편에 다 담으려고 하니 그래서 글은 점점 길어지고 어른스러운 표현에 교훈이 담긴다. 세상 참 피곤하게 사는 시가 된다.
동시 쓰기는 내가 6살이었던 그 때의 나로 돌아가서 써야만 한다. 6살의 나를 돌아보고 해석해서 지금 나이의 내가 쓰는 건 동시일 수가 없다. 어른으로서 동시를 쓰는 일이 이렇게나 어려운 이유는 직관적인 받아들임이 더이상 안되기 때문이다. 판단과 해석과 사유로 전혀 다른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습관이 이미 몸에 배었기 때문이다.
아이다운 순수함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나는 어쩌면 내가 존재하는 이 순간, 공간, 사람에 집중하는 힘을 잃은 것은 아닌가를 돌아본다. 나에게 필요한 건 지금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동시는 결국 어린 시절의 언어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가장 맑게 바라보는 언어이다.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것, 어쩌면 그것이 어른이 동시를 쓰는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