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속에 풍경
클라이밍은 그만두었다. 정말 매력적인 운동이지만 그만두었다. 그만두고도 바위만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여기저기 손끝으로 만져본다 여기는 이렇게 잡고 어디를 디디고 서고 팔 동작은 어떻게 나가야 하며 등등 아마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조건 중에 나무에 오르거나 바위를 타는 행동은 대단히 중요했을 것이다. 더 큰 짐승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것들이 우리 유전자에 남아 있다. 그 맛을 보면 쉽게 빠져나오기 힘들다 죽기 살기로 매달린다 왜? 살기 위해서다. 바위는 내 몸을 지키기 위한 은신처였을 것이다.
카메라 뒤에 은닉해서 살았었다. 행사장이나 많은 사람들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 건 카메라는 방패가 있었다. 파인더 구멍으로 세상을 보고 네모난 사각틀에 세상을 집어넣고자 애를 써왔다. 하루에 수백 장의 사진을 십수 년 동안 찍었다. 그러는 동안 그 틀에 맞춰 살았고 프레임 밖에 세상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내 것에 고집했고 내틀을 견고하게 쌓아 올렸다. 견고하다고 믿었다.
고집스럽게 배꼬며 사물을 관찰했다. 선예도가 좋은 렌즈를 가지고 흐리멍덩한 사진들을 찍고 남들이 버리고 지나 간 피사체에 관심을 가지며 가시광선보다 밤의 텅스텐 빛을 쫓았다. 배꼬고 배꼬다 보면 시선은 비슷해 지나보다. 그래도 배배 꼬인 줄이 더 질기다. 사물의 이면을 한번 훑어보고 다시 그 자리에 돌아와 보면 달라 보인다 그걸 담으면 된다.
그건 일기를 다시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랬으면 좋았을걸 또는 그 상황에 나를 측은지심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진은 나 자신이 다시 거기에 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다른 것을 찍을 수는 있어도 화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사물을 쳐다보는 관점은 그때나 지금도 크게 변화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가치관을 엑스레이 찍듯 나를 드러내는 일이어서 숨길수 없기 때문일까. 완벽한 사진이 있다면 그렇게 표현하고 싶다 그건 내 가치관의 확립이 오롯이 서 있을 때에 가능하다는 걸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