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 규제에 대항하는 게임 업계 자율규제
그동안 몇 차례에 걸쳐 게임에서 발생한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 조작 의혹 사례들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중에서는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징계를 받은 게임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징계는커녕 제대로 된 해명조차 없이 적당한 유저 보상만 제공하고 넘어가곤 했습니다. 게임 회사들이 확률 조작 의혹을 이렇게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는 이유는 게임의 확률형 아이템에 대한 법적 규제가 미흡하기 때문입니다.
확률형 아이템 논란이 있을 때마다 국회에서 규제안이 논의되고, 실제로 몇 번 관련 법안이 발의된 적도 있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된 규제 법안이 통과하지는 못했습니다. 일단 논란이 될 때마다 게임 업계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고, 또 대안으로 게임 업계 자율규제안을 제시하면서 어떻게든 확률형 아이템 규제 법안 통과를 지연시켜 왔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게임 업계의 자율규제안은 정말로 실효성이 있었을까요?
우리나라에서 게임은 항상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을 견뎌내야 했으며, 사회 일탈적인 범죄가 발생하면 높은 확률로 게임이 원인으로 지목되곤 했습니다. 이는 게임 산업이 크게 성장해 콘텐츠 산업의 중심으로 우뚝 선 이후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게임의 부정적인 영향만을 부각해 게임 산업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죠. 이러한 여파로 2011년 미성년자의 게임 접속 시간을 제한하는 셧다운제가 국회를 통과하면서 게임 업계는 충격에 빠집니다.
하지만 셧다운제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게임을 4대 중독 물질로 규정하고, 게임 중독 및 치유 지원을 위해 게임 업체의 매출 1%를 기금으로 징수한다는 내용의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죠. 물론, 이 법안은 통과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위기감에 빠진 게임 업계에서도 자구책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자율규제입니다. 그리고 2015년, 확률형 아이템의 사행성 논란이 거세지고 이를 규제하는 게임법 개정안이 발의되면서 게임 업계는 다시 한 번 자율규제 카드를 꺼내 듭니다.
게임 확률형 아이템 자율규제가 처음 시행된 것은 2015년 7월부터입니다. 당시 시행된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한국게임산업회(당시 한국디지털엔터테인먼트협회) 회원사들은 서비스 중인 게임에서 판매하는 확률형 아이템의 획득 확률을 공개해야 한다.
확률 고지는 게임 내, 홈페이지 및 게시판 등 서비스사가 선택할 수 있다.
아이템별 획득 확률이 다르더라도 같은 등급의 아이템은 묶어서 표시할 수 있다.
청소년이용불가 게임은 제외한다.
그야말로 느슨하기 그지없는 조항들입니다. 확률형 아이템을 팔아 돈을 버는 당사자들이 스스로를 규제하겠다고 나선 순간부터 예상된 결과였죠. 더욱 심각한 것은 이렇게 느슨한 자율규제제도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결국 자율규제 시행 1년 만인 2016년 7월, 확률형 아이템 규제안을 담은 게임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다시 발의됩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게임 업계는 그제야 부랴부랴 자율규제 강화안 마련에 나섭니다.
게임 업계는 2016년 하반기부터 협의체를 구성해 의견을 수렴하고, 자율규제 정비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2017년 2월에 강화된 자율규제안을 발표합니다. 주요 내용은 확률 고지를 게임 내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고정, 대상을 모든 게임으로 확대, 일정한 구매 회수 도달 시 확정 보상, 자율규제 미준수 게임 공표 등입니다. 전반적으로 개선된 것은 맞지만, 사실 근본적인 것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자율규제를 준수하지 않아도 실질적인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게임 회사가 확률형 아이템 자율규제를 준수하지 않을 경우 받을 수 있는 불이익은 공표 밖에 없습니다. 이 게임이 자율규제를 지키지 않는다고 언론과 유저들에게 알리는 것이 고작인 셈이죠. 한국게임산업협회 관계자는 자율규제 미준수 게임이 공표되면 유저들이 게임을 멀리하게 될 것이니 자정 작용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유저들은 여전히 실효성에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게임 업계가 자정의 목소리를 높이며 자율규제를 강화하고 있지만, 유저들의 차가운 시선은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유저들이 바라는 것이 단순한 확률 고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저들은 게임에 지출한 비용만큼의 가치를 얻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구조에서는 절대다수의 유저가 지출한 비용만큼의 가치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높은 가치를 지닌 아이템의 획득 확률이 지나치게 낮기 때문이죠.
많은 유저들이 이렇게 낮은 확률 자체가 도박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게임 업계 자체적으로는 지금과 같은 구조를 개선한 의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저들이 게임 업계 전체에 불신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겁니다. 만약 향후 게임 산업 규제 법안이 통과된다고 했을 때, 과연 유저들은 과연 어느 쪽 편을 들게 될까요? 게임 업계에서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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