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겨울 Sep 15. 2023

오펜하이머의 모순, 모순의 오펜하이머


영웅 서사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평범한 능력으로 자신과 엇비슷한 일상을 사는 의 그저 그런 이야기를 몇 시간씩 듣는 일은 고역이다. 이야기 속 주인공에게 특별함이 요구되는 이유다. 과거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면 십중팔구 왕이 주인공이거나, 이야기의 주요 흐름에서 왕이 어떻게든 관여하는 전개가 등장한다. 과거인의 절대다수가 왕의 얼굴은커녕 궁궐 근처도 가 보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왕의 매력은 권력이 만들어 낸 특별함에서 나온다. 고뇌하는 만인지상의 존재를 향한 동경. 현대로 오면 히어로물의 초인이나 비범한 신체 능력을 가진 액션 스타, 오만하면서도 매력적인 천재에게 주인공의 역할이 주어진다. 비범한 능력과 재주를 갖춘 이의 이야기를 사람들은 좋아한다. 하지만 대단한 능력이 전부는 아니다. 동시에 그들은 부족하고 실패하고 깨지는 인간이어야만 한다.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주인공을 통해 사람들은 이야기에 몰입한다. 내가 갖지 못한 능력을 보유한 인물이 결국은 나와 같은 인간임을 느끼는데서 감정을 공유하고 극복의 희열이 솟아나는 지점이 형성되는 것이다.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았다. 개봉일 즈음에는 좌석을 구할 수 없었다. 역사 인물에 관한 3시간짜리 전기 영화에 쏟아지는 관심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대단한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감독의 명성, 평단의 찬사, 핵무기라는 소재가 주는 흥미가 적절히 뒤섞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두어 주가 지나서야 괜찮은 자리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범접할 수 없는 천재이지만 '나와 같이' 무너지고 실패하는 실존 인물의 이야기는 힘이 있었다.



독사과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지도교수에 관한 앙심으로 교수의 사과에 사이안화칼륨(청산가리)을 주입하는 오펜하이머의 객기는 영화의 원작인 평전에도 등장하는 실제 사건이다. 영화는 이를 더욱 극적으로 묘사한다. 실수를 깨닫고 바로잡기 위해 전전긍긍하다가 다음날 일찍 연구실로 달려 나간 오펜하이머는 독사과가 본래 타깃이 아니라 존경하는 닐스 보어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우연히 평생의 스승을 독살할 수도 있는 상황. 이 범상찮은 사건의 범상찮은 각색은 오펜하이머의 생애와 연관된 더 많은 함의를 담는다. 나치보다 먼저 개발해 전쟁을 끝내게 되리라 여겼던 대량 살상 무기의 종착점은 그것을 만든 이의 결정 권한을 넘어선 일이 되었다. 우연을 따라 알 수 없는 상대에게 넘어간 독사과의 향배처럼. 젊은 오펜하이머는 임기응변으로 청산가리 사과가 빚어낼 뻔 한 참극을 막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오펜하이머 필생의 역작인 트리니티 실험의 결과,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연쇄 작용'은 결코 그의 힘으로는 막아낼 수 없는 것이 되고, 마침내는 그의 인생마저 파괴하게 된다. 젊은 날의 치기 어린 일화에, 오펜하이머의 전 생애를 관통한 주제를 함축하여 확장해 내고 있는 것이다.



천재와 범재

  첫 만남부터 상대방을 '미천한 구두 판매원 출신'이라고 명명한 이가 있다. 이뿐인가. 잘난 지식을 가지고 떠들며 공개 청문회 자리에서 망신을 주질 않나, 자신의 생일 파티에서 인사시키려는 아들과 며느리 앞에서 자신을 무시하고 지나친다. 아인슈타인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사적 원한이 쌓이는 것은 당연지사. 잘난 그를 추락시킬 권력도, 명분도,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충분하다. 계획에 맞게 그를 파멸시킬 차례다.

  스트로스의 서사는, 글쎄,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공감할 만하다. 열등감은 사람의 가장 근원적인 감정 중 하나니까. 천재와 범재의 대결이라면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영화가 하나 있다. 바로 <아마데우스>다. 정신 나간 웃음을 터트리는 맹랑한 천재 앞에 당혹스러운 선배 음악가 살리에리의 열등감과 질투가 모차르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설정의 영화. 실제 살리에리의 인품과 행적과는 연관이 없다손 치더라도,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의 상황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니, <아마데우스>의 두 인물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감독이 스트로스 역을 맡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대개 모차르트 같은 역할을 하는 당신이지만, 이번엔 살리에리여야 한다."


  모차르트인가 살리에리인가.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리를 보며 공감하였다면, <오펜하이머>의 스트로스는 어떠한가. 영화가 스트로스를 그다지 매력적으로 그리지 않았음에도ㅡ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에 대한 감독의 추가 주문은 "권모술수를 행할 때만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ㅡ오펜하이머의 냉대와 조롱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스트로스를 동정하는 마음이 들거나, 적어도 냉기가 흐르는 둘 사이를 조마조마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은 닿을 수 없는 천재의 세계를 동경하면서도 두 발 디딘 현실을 자각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위치에서 나온다.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비공식 청문회와 스트로스의 인사청문회를 끊임없이 교차하며 천재와 범재의 대결을 그려낸다. 영화의 초반부, 오펜하이머의 천재성을 매혹적으로 표현한 연출이 계속된다. 수면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빛이, 파동이, 불꽃이, 별이, 깨지는 유리잔의 파편이 연속되는 장면에서 가슴이 설렜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천재 물리학도의 머릿속을 엿보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블랙홀은 빛을 삼키기에 시각적으로 관찰할 수는 없지만, 이론을 통해 그것의 존재를 증명해 낸다. 관측할 수 없는 세계를 상상과 공식으로 풀어내는 천재라니, 얼마나 놀랍고도 아름다운가. 그는 물리학 분야에서 천재성을 보이는데 그치지 않는다. 한 달 만에 익힌 네덜란드 어로 고차원의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 언어 천재요, 여러 천재를 모아 지휘할 수 있는 리더십을 가진 특출 난 인물에, 여러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는 바람둥이이기까지 하다.


 자수성가한 사업가이자 해군 제독, 정치에까지 입문한 스트로스도 범재라고 하기엔 아까운 인물이다. 살리에리가 당대의 명망 있는 궁정음악가였던 것처럼. 그리고 그는 자기 꾀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천재를 끌어내리는 데 성공한다. 모차르트의 숨을 끊는 데 성공한 살리에리처럼. 물론 그 일이 장차 자신의 정치 생명을 끊어 놓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였다. 이 역시 후회로 미쳐가는 살리에리의 결말과 유사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생이라는 게 얄궂다.



인생의 모순


 오펜하이머의 삶은 모순 그 자체다. 이론물리학의 스페셜리스트이면서도 거대한 프로젝트를 이끈 제너럴리스트. 좌파 성향의 자유주의자. 국익을 위해 대규모 살상 무기를 제작한 애국자이자 핵무기 사용을 적극 추진한 전쟁 영웅이면서 동시에 핵 확산을 반대하는 휴머니스트이자 손에 피가 묻은 것 같다며 칭얼대는 나약한 평화주의자진정한 그는 어느 쪽이었을까.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끝까지 감쌌던 동료에게 배신당하고 발가벗겨진 것도, 배신한 동료의 뒤를 이어 동일한 상을 수상하는 것도 역시 아이러니한 일이다. 스트로스의 서사 역시 오펜하이머와 같은 아이러니로 귀결된다. 스트로스를 파멸로 이끈 증언은 정작 오펜하이머와 친분이 있거나 그에게서 어떠한 도움을 받은 이의 것이 아니었다. 오펜하이머의 복수는 도리어 그가 무시하고, 견해 차이로 두 번이나 무안을 주었던 과학자가 대신 해준다는 오묘한 모순으로 대단원의 종지부를 찍는다.


 대기를 불태울 핵분열의 연쇄 반응에 관한 오펜하이머의 염려는 기우로 끝이 났다. 여전히 불씨는 남았지만, 핵전쟁의 공포에 사로잡혔던 냉전의 위기도 지난 역사가 되었다. 하지만 모순은 끝나지 않았다. 인생은 늘 모순투성이지만, 영화 밖의 현실에서 진짜 모순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오펜하이머를 몰아세운 매카시즘의 광풍이 세월을 뛰어넘어 제국주의와 맞선 독립운동가의 흉상을 쓰러뜨릴 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퀴퀴한 악취로 가득한 오래된 역사의 페이지가 죽어도 죽지 않는 망령처럼 되살아났다. 유령이 또다시 배회하고 있다. 매카시즘이라는 이름의 망령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