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겨울 Jan 26. 2020

[남산의 부장들] 중립을 지키다가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람에 날리는 옷깃으로 불만스럽게 서 있는 이병헌의 모습이 담긴 스틸 컷이 공개되었을 때부터,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개봉 소식은 기대감을 갖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이야깃거리가 되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인 1979년의 10.26 사건을 다룬 또 하나의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사실 만으로도 역사를 공부했던 입장에서 개인적인 구미가 당는데, 사건의 중심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역을 무려 이병헌이 맡는다니.



원작 논픽션 남산의 부장들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며, 영화 개봉에 앞서 원작이라 할 수 있는 책을 읽었다. 영화가 제목을 가져온 김충식의 저서  「남산의 부장들」은 언론인인 저자가 1990년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던 논픽션다. 책은 영화처럼 10.26 사태 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장장 18년에 이르는 박정희 정권의 속성, 그 정권의 핵심 보위부였던 중앙정보부의 역대 부장의 등락을 심으 생존한 사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취재와 방대한 자료 조사 통하여 그려 낸 900페이지가량의 취재집이었다. 유신의, 박 정권의 종말에 해당하는 10.26 사태 또한 당연히 책에 언급되고 있으나, 자는 영화를 기대하였던 내가 바랐던 와는 다르게 알려진 사건의 전개에 관한 서술은 과감히 잘라 내고, 그 원인을 추적하는데 지면을 할애하여 차지철과 김재규의 관계,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상황과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정권 자체적인 특성에 주목하여 서술하고 있었다.(다시 말하면 "차지철 너 이 새끼 건방져"나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와 같은, 잘 알려진 유명 대사들은 아쉽게도 책에서는 볼 수가 없다.)


  다만 책과 영화를 모두 감상하고 나니, 영화가 책에서 영감을 얻은 지점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영화는 원작에 서술되었던 권력의 특성, 곧 권력의 2인자가 갇힌 운명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이용되고 또 어떻게 버려졌는지와 같은 부분들. 실제 역사 속에서 5.16 군사정변을 실질적으로 지휘하여 성공으로 이끌고, 공화당과 중앙정보부를 창설하여 정권의 기틀을 마련한 김종필이 정권 내내 어떠한 견제를 받았는지, 3선 개헌과 유신 체제를 이룬 김형욱과 이후락 중정 부장이 장기집권의 토대를 닦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루어내고 어떻게 버받았는지와(또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이 이루어 내었기에 버림받게 되었다는 사실) 같은 사실들 말이다.





8명을 압축한 두 명의 부장


  1979년 10.26 사태 이전의 40일 간으로 시간적 배경을 제한하고 시작한 영화에 등장하는 두 명의 '부장'은 그래서, 박정희가 임명한 8명 부장들의, 독재정권의 2인자가 갖는 운명을 집약하여 보여주는 역할을 맡아야만 했다. (중립적으로 묘사하고자 했다는 감독이 정치적 시비를 피하 위한 목적이었겠으나) 실존 인물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4대 부장 김형욱을  박용 부장(또 한 명의 김 부장과 구분해야 하니 성씨까지 바꿀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으로,  8대 부장 김재규김규 부장으로 꾸었던  것, 역사적 왜곡의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 부장을 "5.16 혁명 동지"로 뒤바꾸고(실제 김재규는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반혁명 분자로 몰려 박 집권 초기 어려움을 겪었다) 박과 김 사이를 동지이자 친구로 묘사한 '무리수'는 그러한 까닭에서였으리라 생각한다.

  영화에서 김 부장이 "곁을 지키겠다"고 두 번이나 다짐하였던 '각하'를 죽이려고 한 동기의 가장 큰 대목은 그래서 '박 부장'이 차지한다. 대통령을 쏘기 전 박 부장을 위한 '음복'을 하는 장면은 당연히 실제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통령을 쏘고 황망히 현장을 빠져나와 탑승한 자동차에, 겨를 없어 구두도 신고 있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부하의 것을 빌려 신은 김재규의 실제 역사 속 이야기가, 암살을 피해 도주한 박 부장이 신발 한쪽을 잃어버린 채 망연히 자신의 발을 바라보는 장면과 이어지는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그렇게  부장이 회고록에 썼던 표현이, 대통령의 머리에 총구를 당기며 내뱉은 김 부장의 마지막 멘트가 된다. "혁명의 배반자." 김 부장은 비록 충성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고자 친구인 박 부장의 살해 지시를 내릴 수밖에 없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일로 인해 박 부장에게 완벽히 감화하게 되었고, 그것이 다른 요인들과 얽혀 대통령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표출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영화는 그렇게 실제 역사와 완전히 멀어진다. 또한 정치적 논란에서의 자유를 획득한다.


  충분히 매력적인 영화임에도. 아름다운 미장센과 헌신적인 배우들의 연기가 가장 큰 강점인 이 영화는, 그렇게 역사를 흉내 낸 '정치 누아르'가 된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한테 왜 그랬어요"를 외치던 [달콤한 인생]의 이병헌 캐릭터의 재탕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영화가 나쁘다기보다는, 10.26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재해석을 기대한 입장에서의 실망감이라고 하겠다.


  사실 역사를 소재로 했다고 해서, 영화가 역사를 반드시 그대로 다룰 이유는 없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스터즈:거친 녀석들에서, 히틀러의 시신에 기관총을 난사하는 '역사적 사실은 개나 주어 버린' 엔딩을 보고서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영화라는 픽션이 주는 쾌감은 분명 실제 역사와 다른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독 남산의 부장들은 이 지점을 인정하는 것이 어렵다. 왜일까. 원작을 읽었기 때문일까. 말투와 행동까지 실제 역사 인물을 그대로 재현하려 하였던 배우들의 노력이 불러온 역효과일까.





박통의 통치 행위: "임자 곁엔 내가 있잖아."

 

  영화에서 박통이 이야기한다. "임자 곁에는 내가 있잖아." 박 부장과 김 부장이 들었던 이 말이 다른 누군가를 향하는 것을, 궁정동의 박통의 전화를 엿듣던 김 부장이 듣게 된다는 설정은 김 부장의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된다. 원작의 저자는 대통령 박정희의 통치 행위에 대해 '정치를 기피'하고 '정치인을 혐오'하였으며, 대신 밀실에서 '정보'를 통한 권력 유지에 능숙하였다고 서술한다. 사 속 박정희 대통령의 이러한 통치 행위는 그의 절대 권력 구축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는 어느 누구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어느 한쪽에 일을 주고는 다른 한쪽에는 이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맡겼다. 상호 감시를 통해 목줄을 단단히 쥐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하부 조직 간의 충성 경쟁을 유도했다. "각하는 2인자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박 부장의 영화 속 대사는 바로 이러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박정희가 2인자를 용납하지 않을 때, 그의 권력은 공고했다. 늙고 지친 까닭인지 예전의 판단력이 떨어진 박정희가 자녀의 비행과 경호실장 차지철(영화의 곽 실장)의 월권을 눈 감아 주고 한쪽에 일방적으로 무게를 실어 주자, 하부 조직 간의 권력의 균형은 무너졌고 그 지점에서 파국이 시작되었다. 2인자를 용납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차지철이라는 2인자를 용납하였던 것이 문제의 발단이라는 점은, 과연 영화가 박통의 통치 행위를 바로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진다. 장기 집권과 독재를 가능하게 한 박정희의 미묘하고도 잔인한 통치 행위를 영화가 "임자 곁에 내가 있잖아"의 남발로 다소 단순하게 나타내는 점 역시 아쉽다.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잘 몰아가 놓고, 결정적인 순간 그 대사의 동어 반복이 실소를 자아내게 했던 것이다.(대통령의 십팔번인가)




을 지키다가


 박 대통령이 홀로 술을 따르며 나지막이 [황성 옛터]를 부르는 영화의 장면이 생각난다. 지친 권력자의 인간적인 나약함이 잠시나마 드러나, 숨죽여 듣고 있는 김 부장과 함께 관객들 또한 그에 대해 동정할 여지까지도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곧바로 충격적인 전화 통화로 이어지지만...)

  김 부장을 "5.16 혁명 동지"로 각색하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그를 주인공으로 삼고, 그의 시선을 따라가는 영화는 일견 5.16 군사 정변을 긍정하는 모양새를 취하기도 한다. "혁명의 배신자"라는 표현에서도 그것이 드러 난다. 1961년의 군사 정변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으킨 혁명'이라는 것에, 영화 속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동의한다. 박 정권의 출범 의도, 초기 집권 자체는 긍정적이었으나 3선 개헌, 유신 헌법으로 이어지며 이루어진 독재는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함이고, 따라서 대통령이 "혁명을 배신"하였다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실 원작자도 비슷한 논지로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공7과3'이라고. 중국의 마오쩌둥, 소련의 스탈린 사후에도 그들의 뒤를 이은 세력은 이전의 시대를 가리켜 동일한 표현으로 평가한 바 있었다. 좌나 우나 독재자의 집권기에 대한 평가가 비슷하게 이루어지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건조하게 전개된 영화는 많은 장면을 부러 담지 않았다. (진의는 알 수 없다손 치더라도) 체포된 김재규가 외쳤던 "자유민주주의 만세"도, 김재규와 박정희가, 김재규와 차지철이 멀어지는 데 직간접적인 계기를 마련한 큰 딸 영애와 사이비 목사 최의 문제도, 박정희가 키워 낸 진짜 군인으로 군인 집권을 이어가게 된 이후 전두환의 약삭빠른 행적도, 부마 항쟁을 촉발시킨 여공들의 외침이나, 목숨을 걸고 유신 체제에 저항했던, 또 스러져갔던 민주 인사들의 모습도. 역사는 곧 사람의 일이라,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 셀 수 없이 많은 요인들이 버무려져 하나의 사건을 발생시킨다. 이 중 어떠한 것이 주목할 만한 지점인지를 가려내어 제시하는 것이 역사가의 일일 텐데, 영화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 속에 권력에 버림받은 2인자 부장들의 이야기로 비교적 단순하게 치환하여 사건을 제시한다. 10.26 사건을 단순히 권력의 비정함을 보여주는 정도에서 펼쳐내고 그것으로 만족하였다는 점이 나는 다소 아쉽다.




  다음은 원작 논픽션을 읽다가 눈에 들어온 부분. 작가는 수집한 자료를 엮어내며 작가적 통찰을 통해 박 정권의 20년을 관통하여 나타난 수미상관의 인상적인 구조를 몇 가지 발견해 내기도 했다. 인상적인 지점들을 열거해 보면,


  - 5.16 군사 정변 당시 총알이 날아오는 한강 다리를 건너던 박정희 소장의 대사 "괜찮아"가 총을 맞고 쓰러져가는 그의 죽음의 순간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는 점.

  - 5.16 군사 정변 당일 육사 생도의 가두시위를 이끌어내어 쿠데타의 성공에 일조하였던 전두환 중령의 분주함이, 20여 년 뒤 10.26 사건을 수사하며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꿰차고 또 한 번의 군사 쿠데타를 통해 군부 독재의 연장으로 이어진다는 역사의 아이러니.

  - 영화에서도 표현되었는데, 원작을 읽다가 눈에 들어온 맥걸리(맥주+막걸리)와 막사(막걸리+사이다). 예나 지금이나 술 섞어 먹는 것을 왜들 그리 좋아하는지.

  - 안하무인 차지철 경호실장은 실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는 사실. 그래서 본인의 마지막 순간이었던 10.26의 궁정동 안가 대행사에서도 술은 입에만 대는 척하고 일절 마시지 않는 것으로 끝끝내 종교적 신념을 지켰다고.(그런데 총은 왜 안차고 있었던 거야) 오히려 김재규는 간경변이 심각해 술이 독약이었지만, 박 대통령은 늘상 김 부장은 술을 좋아한다며 강권하였고 김재규는 이를 거절하지 못하였다더라.(그래서 더 서러웠나)





매거진의 이전글 오펜하이머의 모순, 모순의 오펜하이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