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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Jan 26. 2020

[은교]를 마저 읽었다

흘러가는 것에 대한 비애

  「은교」를 마저 읽었다. 언제나와 같았다. 책을 집어 들고 읽던 곳을 찾았다. 한 시간 여가 지나자 페이지가 모두 넘어갔다. 은교의 눈물을 보며, 나는 우울해졌다.(눈물은 오늘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누군가를 기다리기에 책 읽기 만한 것이 없고, 기다리면서 읽기에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 소설만 한 것이 없다. 정지우의 영화 「은교」를 보았던 것은 수년 전의 일이었다. 멀티플렉스의 아르바이트생이 신분증을 검사하는 사이, 다른 이들은 별 제제 없이 옆을 지나쳤었다. 그것을 제외하면, 환하고 어두웠던 영화는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감상으로 영화를 보았기에 소설도 보게 되었다. 영화가 소설의 플롯을 충실히 따랐다는 사실을, 소설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영화는 늙은 시인의 입장에 충실했고, 시인의 감정에 관객을 이입시켰다. 소설은 그것에 비해 포괄적이었다.

 

  <당나귀>를 닮은 소설 속 시인의 모습은 책 표지의 박범신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교과서에 작품이 실린 채 산 채로 박제가 되어가는 소설 속의 시인은 아마도 작가의 이상향에 가까울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훤칠한 키에, 완력으로 젊은이에게 밀리지 않는 노익장을 자랑하는 시인이었다. 적요라는 필명답게 평생 시만을 적어 온 시성(詩聖)의 모습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수필과 장르문학을 통해 욕망을 풀어낼 줄 알았던 시인이었다. 아마도, 일흔넷의 노령으로 열아홉 소녀를 사랑했던 시인 괴테의 이야기가 영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아니었을까. 늙은 시인을 꼭짓점으로 하여, 소설은 충실히 삼각관계의 법칙을 따르고 있었다.



  본래 삼각형의 구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최대의 안정감을 주는 것이라 하였다. 예로부터 제기용 솥을 지탱했던 것은 세 개의 발이었고, 솥 정(鼎) 자 역시 세 개의 발을 형상화하였으며, 고구려의 개소문은 이를 비유로 들며 유교와 불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중국으로부터 도교를 들여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드라마나 애정소설에서 차용하는 삼각관계 역시 이러한 안정감을 기반으로 하는 것인데(혹은 보장된 흥행을 기본으로 하는 것인지도),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대표적인 예가 된다. 두 개의 삼각관계가 교차하는 이 장편소설은 한 사람의 소멸이 전체 관계의 파멸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의 반복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다시 「은교」로 돌아오면, 이 소설 역시 오해와 질투의 동력으로 형성된 삼각관계가 등장한다. 시인은 은교를 사랑하는 동시에 제자를 질시하고(여기에는 사랑의 감정 또한 포함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제자는 은교를 사랑하며 동시에 스승을 존경하며, 은교는 시인과 제자의 사랑에 자신이 소외되어 있다고 느낀다. 시인은 제자의 젊음을 시샘하고, 제자는 시인의 재능을 질투한다. 은교는 시인을 사랑하고 제자에게 몸을 허락한다.
 
  어떤 작가가 "모든 사랑은 오해"라고 썼던 바, 오해인 것이 어디 사랑뿐이겠는가마는, 일흔 살 노인과 여고생의 사랑 역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막장> 일뿐이기에



  시인은 제자를 의심하며, 그 결과는 붉은 살의(殺意)로 치닫는다. 시인은 제자를 죽이는 데에 실패하나, 제자는 유명을 달리하며, 삼각관계 역시 무너져 내린다. 안정감 있는 삼각형에서의 한 축의 소멸은, 나머지의 관계 또한 붕괴시키는 법이다. 시인과 제자의 마지막 글 앞에서 은교는 오열하고, 소설은 급히 막을 내린다. 나의 영원한 처녀, 은교에 대한 환상은 오해였으나 오해가 아니었으며, 욕망이었으나 욕망이 아니기도 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선생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나에게 모든 것을 물려줄 심산이기도 했다. 나는 시인을 사랑했으며, 또한 제자도 사랑했다. 주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은 오해의 맹점이었다.
 
  늙음과 욕망에 대한 한탄보다, 오해에 대한 방점이 마음을 울리는 것은, 나는 아직 젊다고 믿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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