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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Jan 31. 2020

빛과 그녀의 이야기

  어두운 복도였다. 좌우에 연이어 붙은 강의실을 따라 쭉 뻗어 있는 일자형의 복도.  모두 꺼진 복도, 사람의 기척 없이  층계에서 피어오르는 흐릿한 빛이 가만히 맴돌 뿐이었다. 둠 속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한 여자를 마주쳤다. 쇼트커트의 짧은 머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 평범한 듯 낯익은 얼굴. 누구지? 아는 사람이던가? 생각했고, 그녀가 고요한 복도에 높은 굽의 날카로운 구두 소리를 또각또각 울리며 저만치 사라지고 나서야,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 낼 수가 있었다. 조금 전 내 어깨를 스쳐 지나갔던 여자, 국어국문학과, 입학할 때부터 큰 이슈를 몰고 다녔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아마 입학 과정에서 특례가 아니냐는 비판적인 여론이 있었던 것도 같다. 시간이 많이 지났기에 그녀가 지원한 것이 특기자 전형이었는지 일반 전형이었는지와 같은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나와 같은 계열 나와 같은 학번의 대학생이 되었고, 돌고 도는 이야기들로 종종 그녀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밴을 정문 밖에 세워두고 강의실까지 걸어 다닌대. 학생들에게 사인을 해 주지는 않는다네. 비판 여론을 의식했는지는 몰라도, 학교 생활을 성실히 한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출석부에 분명히 이름이 있었는데, 정정 기간에 수강 철회를 한 것 같다며 멋쩍게 웃던 뚱뚱한 교수의 얼굴이 기억난다. 친구 놈 하나는 모 수업에서 그녀와 함께 조별 과제를 수행하게 되었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녀와 밥을 먹다가 기자들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손목을 그러 쥐고 도망을 쳐야 했다는 친구 놈의 허풍을 한 자도 믿을 수 없었으나,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너와 같이 있었으면 아마 기자들이 보고도 교수님과 식사하는 줄 알았을 것"이라 덧붙여 주기는 했다.) 같은 강의를 들은 적도 없었고, 경영관 앞에 서 있으면 전교생을 만날 수 있다는 좁은 캠퍼스 안에서 얼굴을 보았던 것도 그때, 그날의 컴컴한 복도가 유일했기에. 게다가 그때 받은 인상 역시 평범하고 낯익은 얼굴이라는 것이 전부였으므로 더욱 그러했었다. 그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유명인일 뿐,



  연극 <클로저>를 보기 위해 소극장을 찾았을 때, 나는 무대 위의 그녀를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영화에서 나탈리 포트먼이 분했던 주인공 알리스의 역할을 맡은 그녀의 연기 변신에, 언론에서 관심 어린 기사를 한창 내보내던 시점이었다. 다른 장르의 첫 연기 도전이라, 감정이 어떻고 발성이 어떻고 하는 식의 회의적인 의견들 더러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그녀, 눈 부신 조명이 비추는 무대 위로 걸어 나온 그녀는, 그저 평범하고 익숙했던 그녀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아름다웠던 기억이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극이 상연되는 내내 눈을 떼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았었다. 어떤 작가가 소설에서 썼던 표현을 기억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빛을 가지고 있는데, 소위 스타들이 누구보다 화려하게 빛날 수 있는 이유는, 대중들이 자신을 비추는 스스로의 빛을 무대 위의 그네들에게 남김없이 모아 주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빛을 잃어버린 대중들은 끊임없이 무대 위의 별들을 부러워하고, 까닭도 모른 채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며 살아간다고. (정확한 문장은 아니고, 대충 그런 뉘앙스였다. 책을 뒤져보고 정확한 문장을 적어 넣기에는 무언가 귀찮은 저녁이다.) 그날 소극장에 모인 관객들의 빛은 모두 그녀 한 사람을 향해 그녀 한 사람을 위해 비추고 있었고, 그날 그녀는 그래서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요새 무얼 하는지 매스컴에 잘 오르내리지 않는 그녀다. 아마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국어국문학과를 선택한 이유가 언젠가 시나리오를 쓰고 싶은 까닭이라 했던 인터뷰가 기억이 난다.) 나야 그녀의 팬도 아니고, 이제 앞으로 아무도 없는 컴컴한 복도에서 마주칠 일 따위는 더욱 없겠지만, 두 장면에 담긴 그녀의 모습 잊지는 못할 것 같다.




- 서툴게 인용한 소설은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입니다.

- 대개 아시겠지만 굳이 그녀의 실명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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