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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Jan 31. 2020

잊는다는 것

   어느 새벽, 편의점에서 비스킷을 먹고 우유를 몇 모금 마시던 남자가 밖으로 달려 나가 구토를 한다. 편의점으로 다시 돌아와 빈 우유팩을 버리고 여직원이 있는 카운터에서 담배를 산다. 괜찮으세요? 여직원이 묻는다. 머쓱해진 남자는 말한다. 제가 치우고 갈게요. 놀란 얼굴의 여직원,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구요, 답한다. 남자의 기억이다.
   당혹스러운 얘기지만 여직원의 기억은 조금 다르다. 괜찮으세요, 하고 물은 것 까지는 같다. 그래서, 치우란 얘기야? 짜증스러운 남자의 반응에 여직원은 당황한다.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구요.

   박민규의 단편 소설 「아침의 문」의 한 장면이다. 두 가지 시점으로 이야기를 병치시키며 어느 한쪽을 <신뢰할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로 만드는 소설적 기법. 이는 비단 소설의 장면으로 그치지 않는다. 불확실한 인간의 기억은 경험을 사실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 사람은 그 스스로가 <신뢰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다. 잔뜩 화가 나 빗자루를 쥐고 달려오는 어머니를 피해 달아나, TV를 보시던 외할머니의 등 뒤에 숨었던 다섯 살도 안된 어린 날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때의 억울함과 긴박함까지도. 그런데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해서 그런 지경에 이르렀는지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저 편한 대로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것, 인간이 돼먹지 못한 까닭이라고? 아니, 이것이 구성오류다.

    도리어 망각은 신 축복이 된다. 솔로몬 세레세프스키는 구소련의 신문기자였다. 기억력에 있어 그는 엄청난 능력을 지녔는데, 이탈리아어를 전혀 못하는데도 단테의 「신곡」을 한번 듣고는 이탈리아어로 줄줄 읊어 대었다 한다. “16년 전 3월 7일 오후 2시에 내가 당신에게 한 말 중 스물여덟 번째 단어는 무엇이었어요?”라는 질문에 척척 대답할 정도. 안타깝게도 기억력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밤낮으로 괴로워하며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종이에 적어 갈기갈기 찢고는 불태우기까지 했다고. 방대한 기억은 훗날 그에게 정신질환을 안겨다 주었다고 한다.

   에우리피데스가 말했다. 불행을 잊는 것만으로도 이미 행복의 절반을 얻은 것이다. 기억할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잊을 수 있은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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