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이야기한 대로 본래 추위를 잘 타지 않는 편이다. 겨울에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겠다고 객기를 부린 것에는 이런 자신감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그리고 그 자신감은 첫째 날 밤부터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오후 다섯 시가 넘어서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었고, 저녁을 먹으니 해가 저무는 시간이 되었다. 딱히 무언가를 하기는 어려운 시간이지만 버리자니 아깝기도 해서, 첫날 저녁에는 '독수리 전망대'에 가는 것으로 계획을 세워 놓았었다. 어느 곳이든 여행지라면, 높은 곳에 올라 스카이라인을 감상하는 것이 하나의 공식 아니던가. 야경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시간을 보내며 해가 지기를 기다린 적이 많았다. 타이베이의 101 타워, 가오슝의 85 Sky tower, 오사카의 공중정원이나 대관람차 등등. 여기에 이어 독수리 전망대에서 바라본 블라디보스토크의 아경이 새로운 컬렉션이 될 터였다. 숙소를 나설 때까지, 기념품 샾이 유명하다는 이 전망대가 실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채였다.
한글 간판을 보니 반가워 찍은 사진.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당할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숙소에서 20여분을 걸으면 케이블카 비슷한 푸니쿨라를 탈 수 있다고 하기에(뭐 타는 거 되게 좋아한다) 구경도 할 겸 우선 걷기 시작했다. 상점이 이어진 도심가는 얼마 되지 않아 사라졌다. 조금은 이상했다. 구글 지도가 가리키는 전망대 위치에 가까이 갈수록 인적이 줄어들었다. 가로등이 드물어졌다. 어둠 속에서 얼어붙은 바닥이 미끌거렸고, 길이 울퉁불퉁해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걸어야 했다. 언덕을 오르며 가빠지는 내 숨소리 이외엔 적막만 가득했다. (관광지... 라며?) 블로그의 사진을 찾아 내 눈 앞에 펼쳐진 길과 연신 비교하였으나 건물은 비슷한 듯 다른 모양이었다. 푸니쿨라 타러 가는 길이라는 곳은 산 아래 인적이 드문 주택가였다. 멀리 어둠 속에서 빠알간 담뱃불이 가끔 깜박거렸고, 목줄을 매지 않은 대형견 한 마리가 어슬렁거렸다.(과장을 보태면, 커다란 털북숭이가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자 처음엔 곰인가 싶었다.)
골목 사이사이에 이런 동상들을 찾아볼 수 있다.
당황했다. 그런데 재미있었다. (블로그의 안내를 따라가는 주제에) 탐험가가 된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예쁜 건물에 조용한 길이 좋았다. 사전에 여행 계획을 짤 때에 해 지고 어두워지면 늦게 다니지 말고, 큰길 주변 이외의 골목은 들어가지 말라던 경고를 읽은 것도 같은데, 나는 어느샌가 휴대폰이 꽂힌 셀카봉을 휘두르며 골목길도 아니고 불빛 없는 산길을 신나게 걷고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블로그에서 설명된 푸니쿨라 승강장이 보였다.(아니 왜 이런 곳에)
푸니쿨라가 무언지 몰랐고, 케이블카의 한 종류를 이르는 것인가 보다 했는데, 레일 위를 달리는 작은 전동차 같은 것이었다. 타도 되냐고 영어로 물었더니 막 출발을 하려던 참이었는지 얼른 타라고 담당자가 러시아어로 대답했다.(당연히 못 알아들었고, 분위기상 그런 것 같아 스빠시바를 외치며 급히 탑승했다) 오후 8시까지 운행한다고 했으니까, 거진 막차에 가까운 것 같았다.
좌석이 향한 방향과 반대로(그러니까 뒤로) 푸니쿨라가 움직였다. 무얼 타니까 또 신이 났다. 안에는 취한 듯 보이는 남성 한 명과 러시아 연인 한 쌍이 이미 타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창 밖을 보려고 하는데 요금을 걷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의 수금에 급하게 주머니를 뒤졌다. 얼마냐고 영어로 물었더니 러시아어로 답을 해 주었는데, 이건 당연히 눈치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곤란해하자 손 위에 올린 동전을 보여 주었는데, 조명이 없어 어두컴컴한 푸니쿨라 안에서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급한 대로 100루블짜리 지폐를 쥐어 주었더니(500루블 짜리 였었... 나?) 난감하다는 반응을 하고는 잔돈을 가져다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요금이 12루블이었단다. 짜증 날 법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루블 화폐의 단위에 대한 감이 없을 때였다.
러시아의 푸니쿨라의 모습. 밤에 보았기에 검은 형체만 확인할 수 있었다.(이런 모양이었구나)
어렵게 요금도 지불했고, 이제 바깥 사진도 찍고 구경도 좀 해 볼까, 했는데 액정을 아무리 두들겨도 휴대폰 화면이 켜지질 않았다. 아니 얘가 왜 이래? 하고는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는데도 묵묵부답. 운명하셨습니다. 장갑을 벗고 폰을 만져보니 아풀싸, 얼음덩이처럼 차가웠다. 셀카봉의 끝에 매달아 찬 바람을 가르며 휘두르고 다녔더니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방전되어 버린 것이었다. 아이폰이 추운 데서 약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하였는데, 아이폰도 아닌 내 폰마저 같은 운명을 맞이할 줄이야. 이번 여행 내내 가장 당황한 순간이었다. 이렇게 전원이 나가버릴 수 있다고는 단 한 번도 짐작하지 못했다. 푸니쿨라가 멈췄다. 휴대폰은 여전히 반응이 없고, 다 왔단다. 내리란다. 순식간이었다.
휴대폰이 죽으면 전망대에 올라도 사진 하나 찍을 수 없을뿐더러 구글 지도 없이 이삼십 분 산길을 헤치고 숙소까지 되돌아 갈 길도 막막해진다. 공포가 몰려왔다. 급한 대로 보조배터리를 꽂았다. 한참 반응이 없다가, 배터리 잔량이 4퍼센트라고 뜰뿐 전원이 켜지질 않았다. 사람이 추위에 강한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휴대폰이 추위에 강해야 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핫팩이 그리웠다. 여행 준비를 위해 이것저것 검색할 때에, 필수 아이템 따위의 표현으로 핫팩 이야기가 나오길래 가볍게 무시했었다. 조금 전까지 블라디보스토크의 밤을 휘젓고 다니면서도 이 정도 날씨라면 충분히 견딜 만 한데? 하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상황이 달라졌다. 휴대폰을 따듯하게 데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도 좋았다. 그러나 열을 내는 도구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상의 주머니 깊은 곳에, 알을 품듯 따듯하게 휴대폰을 품어 두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문제가 또 있었다. 푸니쿨라가 전망대에 바로 내려주는 게 아니었다. 육교를 두어 개 지나서, 울퉁불퉁한 돌계단이 놓인 산길과 언덕길을 또 한참 올라가야 한다. 여기엔 조명이 없는데, 돌계단 위엔 허연 얼음이 2-3센티씩 하얗게 덮여 있다. 휴대폰 때문에라도 푸니쿨라에서 내려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는데, 길도 이게 맞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술 취한 것처럼 보였던 아저씨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주위를 둘러보니 저쪽에 러시아 커플이 열심히 걷고 있었다. 길은 하나, 오직 저들을 따라가야 한다! 맹렬한 추격이 시작되었다. 연인들에게는 불청객이 하나 따라붙은 셈이었다.
독수리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블라디보스토크 전경. 이것을 보기 위해 그 많은 고생을 하였다.
휴대폰이 살아났나 꺼내어 확인해보고, 검은 화면을 소생시키겠노라고 하아, 휴대폰에 입김을 불어넣으면서, 또 녹여 보겠다고 품 안에 감싸 쥐고서, 언덕길을 오르고 측면의 돌들을 손으로 짚어 가며 난간도 없는 미끄러운 돌계단을 올라 비로소 독수리 전망대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전망대는
경치 좋은 동네 뒷산 같은 곳이었다.
블라디보스톡과 루스키섬을 잇는 금각교를 중심으로, 야경이 참 아름다웠다. 다만 추운 날 사방이 뻥 뚫린 높은 곳에 올랐으니 더욱 추웠고, 기념품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일찌감치 문을 닫은 후였다. 러시아 연인들은 더 깊숙한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올라오니 드문드문 사람들이, 사랑으로 추위를 잊은 연인들이 보였다. 그때, 휴대폰이 겨우 전원이 돌아왔다. 급하게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사진을 남길 수가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헤매다 찍은 사진. 인도의 바닥을 보면, 얼음이 완전히 엉겨붙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한다.
돌아오는 길은 휴대폰을 살리고자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였다. 푸니쿨라로 올라간 길은 계단으로 걸어 내려왔다. 휴대폰이 또 한 차례 숨을 거두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멀쩡히 살아 돌아왔으니 염려는 놓으셔도 좋겠다. 따듯하고 아늑한 숙소에 마침내 도착하였으므로. 한 시간 여를 더 헤맨 뒤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