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촌 기념비에서 이상설을 생각하며

홀로, 블라디보스토크⑤

by 한겨울

신한촌 기념비를 향해


이번 여행의 가장 중요한 목적지는 신한촌 기념비였다.


서두에 밝힌 대로 여행의 명분을 전공과 직업이 만들어 주었기에, 여행의 코스 역시 이와 밀접한 곳을 먼저 생각해서 짜두었다. 도심 외곽으로 나가면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문화센터나 이상설선생유허비와 같은 곳에 갈 수 있었으나 교통편을 생각해야 했다. 차량으로 2시간 정도의 거리였는데, 2박 3일이라는 짧은 일정을 핑계로 택시를 탈 엄두를 내지 않았다. 낙 급작스럽게 계획한 여행인지라 일일투어 같은 것은 예약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여행 내내 블라디보스톡의 시내서만 맴돌았는데도 빠듯하게 짜인 일정에 힘겨울 지경이었으므로, 외곽으로 벗어나지 않은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결정이었다.


다만 신한촌 기념비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아주 멀지는 않은, 숙소에서 걸어서 40분 정도의 거리였다. 첫날 저녁의 시간을 허비하기 싫어 선택한 독수리 전망대를 제외하면, 이번 여행의 첫 번째 일정은 당연히 신한촌 기념비라고 할 수 있었다.


신한촌 기념비를 향해 가는 길에 있었던 조형물. 세계 여러 도시들의 이름이 써 있었는데, 그 중 부산이 눈에 띄었다.


글 지도를 통해 어서는 40분, 버스를 타면 30분 정도 걸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별 고민 없이 걷는 편을 선택하였다. 시간이 비슷했을뿐더러 처음 맞이한 낮의 블라디보스토크를 두 발로 쏘다니며 직접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햇살이 환한 도시를 천천히 둘러보며 사진도 찍고, 도중에 있는 포크롭스키 성당과 공원에도 들를 계획이었다. 부러 버스 타기를 피한 까닭도 있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여행지에서 버스를 타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요금은 탈 때와 내릴 때 중 언제 내 하는지, 요금은 얼마이며 잔돈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와 같은 것들이 걱정거리다. 러시아어로 안내될 정류장을 확인하고 제때 내리는 일 또한 쉽지 않음 알고 있었다. (이전의 대만 여행에서는 버스를 잘만 타고 다녔는데, 충전식 교통카드를 구매하면 지하철과 버스를 모두 이용할 수 있었고, 버스 내 전광판에 번체자의 한자로 안내가 나와 위치를 확인하기 수월했으며, 중국어 발음을 영문으로 표기한 설명이 꼭 따라붙어, 내려야 할 곳을 놓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디보스토크는 그다지 넓지 않은 도시라서, 웬만한 여행지는 걸어서 20분 거리 안에 위치해 있었다. 이 말인즉 신한촌 기념비가 이번 여행의 전 일정 중에서 가장 먼 거리 위치한 목적지라는 것이고, 또 이곳까지 걸어서 이동하였다는 것은 이후에도 버스를 탈 일이 없었다는 야기였다. 40분 동안의 보행에 대비하여 방한용 마스크를 포함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블라디보스토크 아침의 추위는 도리어 어젯밤의 그것보다 매서 느낌이었다.


건널목에서 찍은 신호등의 모습. 나라마다 제각기 신호등의 디자인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러시아의 것은 둥근 모양이다.



이상설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당당하게 변명을 늘어놓자면, 역사 교사라고 모든 역사에 대해 해박할 수는 없다. 책임감을 가지고 계속 공부를 해 나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교사들끼리도 이런 사실을 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떤 생물 선생님은 남산으로 교사 야유회를 나갔다가, 다른 선생님들이 보이는 나무마다 식물마다 그 명칭을 물어오는 바람에 통 애를 먹었다. 걸어 다니는 도감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다 알겠는가. 요즘 세상엔 인터넷 검색이 훨씬 빠르고 정확하다.


그렇지만 검색을 통해 나타나는 사실과 사실들을 꿰어 내고 거기에 의미를 담아 어떻게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내어 전달할 것인가, 하는 부분만큼은 교사의 고유한 영역이며 능력이라는 데에는 공감한다. 1910년대 국외, 특히 국경에서 멀지 않은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는 무장 독립 투쟁을 위한 준비 작업이 한창이었다. 한인들이 모여 형성된 마을에 한인들의 자치 기구가 세워졌고, 교육기관이 만들어졌고, 군대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이는 1920년대 초 봉오동과 청산리 등지에서의 빛나는 승리로 이어졌다.


보재 이상설(1871~1917)의 모습

그 중심에 이상설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실패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만주와 연해주, 멀게는 미주와 구라파에까지 고루 족적을 남겼다가 말년에는 상하이에서 한 많은 생애를 마쳤던 그는, 망국 이후 국외로 독립운동의 축이 옮겨지는 과정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하며 존재감을 보인 인물이었다. 그를 따라가다 보면 여기 블라디보스토크로, 또 신한촌 기념비로도 이어지게 되는데, 그것은 2018년 연초의 살 떨리는 추위에 나를 블라디보스토크에까지 오게 만든 이유였다.


그는 뛰어난 학자였다. 우당 이회영과 함께 수학하며 20세에 이미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1894년 조선의 마지막 과거 시험에 급제하였을 때의 나이가 스물다섯이었다.(이 시험의 응시자 중에는 훗날 대통령이 되는 청년 이승만도 있었다. 비록 합격하지는 못했지만.) 27세에는 성균관 대사성(지금으로 치면 서울대학교 총장이라고나 할까)이 되었다. 출세와 성공이 보장된 인생이었으나 망국의 지식인이라는 운명은 젊은이의 남은 인생을 녹록지 않게 만들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상설은 끝까지 반대하며 고종에 같은 상소를 다섯 번이나 올려 인준 반대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나약한 군주에게는 불법적인 조약을 어찌해 볼 권한이 없었다. 조약에 반대하여 자결한 민영환의 소식을 들은 이상설은 종로 거리에 나가 시민들을 상대로 국권 회복을 염원하는 연설을 한 후 땅에 머리를 부딪혀 자결을 기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이듬해 제수받은 영의정의 자리를 사임한 그는 결국 국권회복을 위한 국외 망명의 길에 올랐다.

이상설의 도착지는 만주였다. 한인 마을 용정촌에 서전서숙이라는 기숙학교를 만들어 신학문을 가르치고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때 고종이 그를 다시 불렀다. 비밀 특사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상설이 특사로 떠난 이후 서전서숙은 재정난과 일제의 방해를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가, 곧 명동촌의 명동학교로 승계되었다. 명동학교는 이후 독립운동가를 다수 배출하였는데, 그 출신으로 유명한 이가 많았다. 만주에서 나고 자란 윤동주 시인이 대표적이다.)


고종의 비밀 특사 3인 중 이준은 법률가였고, 영어와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7개 국어에 능통하였던 21세의 청년 이위종은 통역관 역할을 맡았으며, 이상설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만국공법을 공부한 국제법 전문가였다. 서울에서 출발한 이준은 이상설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합류하여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유럽으로 이동하였다. 이후에 이상설이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고 활동한 것을 보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특사'들은 이때부터 이미 이곳을 앞으로 새로운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겠노라 점찍어 놓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헤이그 특사의 모습.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잘 알려진 대로 헤이그 특사는 실패하였다. 열강은 동맹국 일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어 하지 않았고, 세 명의 특사는 만국 평화 회의의 회의장에 입장조차 하지 못했다. 진전이 없던 상황에서 이준이 사망하였다. 남은 이들은 미국으로 향했다. 뉴욕에 도착하여 대통령을 만나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려 하였으나 이 역시 실패하였다. 일제는 실패한 특사 사건을 문제 삼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귀국길이 막힌 특사들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이후 이상설은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 지방에 독립운동 기지 한흥동을 건설했다. (밀산부 한흥동은 나중에 간도 참변으로 만주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독립군 부대들이 집결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는 장소로 다시 한번 등장한다.) 연해주 방면의 의병들을 모아 13도의군을 편성하고 퇴위당한 고종의 망명을 시도하였으나 이마저도 실패. 한일합병 이후에는 연해주의 한인들을 모아 성명회를 조직하였는데, 조직의 명칭은 '저들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원통함을 밝힌다(聲彼之罪明我之寃)'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자국의 이익에 따라 동맹과 원수가 종잇장처럼 뒤집히던 제국주의의 시대였다. 불과 5년 전 러・일전쟁의 숙적이었던 두 나라는 세계대전을 앞두고 관계를 회복해가고 있었다.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한민족의 독립 결의를 밝히는 성명을 내 건 단체의 존재에 일본은 강력하게 항의하였고, 러시아는 이를 수용하였다. 성명회와 13도의군의 주요 인물들은 체포되었고 러시아의 한인들은 정치활동을 엄금당하였으며 이상설은 추방되었다. 그러나 이상설은 이에 굴하지 않고 1년 만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되돌아와, 신한촌에서 홍범도 등과 함께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였다. 한인들의 생업을 위한 활동을 권장하는 순수 경제 단체로 위장하였으나 독립운동을 위한 광복군 양성이 근본적인 목표였다. 기관지 <권업신문>을 간행하여 연해주 지역 한인들의 독립의식을 고취시켜 나가기도 하였는데, 신채호가 주필로 있었다.


1914년은 연해주 이민 50주년이자 러・일전쟁 1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상설은 대한광복군정부를 건립하고 정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한일합병 이후 최초의 망명정부이자 군 정부였던 대한광복군정부는 시베리아와 만주, 미주에 널리 퍼져 있는 독립운동 세력을 모아, 독립전쟁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마을까지의 지도(좌)와 우수리스크에 있는 이상설선생유허비(우). 여기까지 가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또 한 번 시련이 찾아왔다. 그해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던 것이다. 전시의 상황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차 세계대전의 동맹국인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한 러시아가 한인의 정치・사회 활동을 전면 금지하였고 권업회를 해산하였던 것이다. 타격을 받은 대한광복군정부 또한 해체되었다. (1919년의 3.1 운동 이후 연해주 지역에 남은 대한광복군정부 출신의 한인들은 대한국민의회를 성립하였고, 국외 다른 임시정부들과 통합의 과정을 거쳐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로 이어지게 된다.) 러시아에서의 실패 이후 이상설은 상해로 이동하여 신한혁명당을 창설하고 다시 고종의 망명을 추진하였는데, 이마저도 발각되어 사실상 활동이 중단되었다. 결국 연해주로 돌아온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우수리스크에서 1917년, 한창의 나이인 48세에 순국하게 되었다. 마지막에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것은 이상설의 무덤이 없고, 우수리스크에 유허비만 남은 까닭이다.




신한촌 기념비 앞에 서서


아파트 단지 사이에 기념비만 덩그러니 서 있다


걷는 일은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여행객들로 북적이지 않는 곳을 지날 때가 더욱 그러했다. 나에게는 여행지겠지만, 그들에게는 일상의 공간이었으니까. 아침에는 출근하는 사람들의 대열과 마주했고 오전에는 사람들이 빠져나가 조용해진 아파트 단지 사이를 지나쳤다. 좋아하는 여행의 풍경이었다.


이때만 해도 구글 지도의 안내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아서, 왕복 8차선의 차들이 쌩쌩 지나다니는 큰길을 가로지르도록 되어 있는 곳에 횡단보도가 없어 난감한 경우가 있었다. 언젠가는 횡단보도가 나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마냥 길을 따라 었는데 아무리 해도 길을 건널 곳이 보이지 않아, 결국은 제자리로 되돌아와야 했다. 한참을 헤맨 끝에 전혀 의외의 곳에서 계단을 발견했고, 그리로 내려가니 큰길의 반대편으로 나갈 수 있는 지하 굴다리가 보였다. 이런 식으로 걷다 보니 40분으로 안내된 길을 한 시간은 족히 걸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신한촌 기념비에 도착했다. 1937년, 러시아는 소련이 되어 있었고, 새로이 전개되는 두 번째 세계 대전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제국주의는 그들의 적국이었다. 소련의 통치자 스탈린은 일본 첩자의 러시아 극동 지방으로의 침투를 막는다는 이유로 수만 명의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강제 이주 고려인 중에는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라 잃은 백성들은 러시아와 일본의 사이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상관없이, 마찬가지로 핍박을 당했고 신한촌은 마침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제 신한촌의 흔적으로 남은 것은 오로지 세 개의 기둥뿐이었다.


신한촌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적혀 있었다.

민족의 최고 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다. 이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민족적 성전이며, 청사에 빛난다. 신한촌은 그 성전의 요람으로 선열들의 얼과 넋이 깃들고 한민족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곳이다. 1910년 일본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당하자 국내와 지사들은 신한촌에 결집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필사의 결의를 다졌다. 성명회와 권업회 결성, 한민학교 설립, 신문 발간, 13도의군 창설 등으로 민족역량을 배양하고 1919년에는 망명정부(대한 국민의회)를 수립하여 대일항쟁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한민족은 1937년 불행하게도 중앙아시아에 흩어지게 되고 신한촌은 폐허가 되었다. 이에 해외한민족연구소는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선열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재러/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며, 후손들에게 역사인식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이 기념탑을 세운다.
- 1999년 8월 15일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


오래 걸은 탓에 춥기도 하고 덥기도 하여 가쁜 숨을 몰아 쉬며 기념비의 사진을 찍고 있는데, 인적이 드문 이 곳에 커다란 버스 차량이 한 대 멈추더니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 이쪽으로 다가왔다. 한국인 관광객들이었는데, 만주나 연해주 지역의 역사 투어를 진행 중인 것으로 보였다. 아마도 이들은 내가 가보지 못한 우수리스크나 이상설유허비 등도 들리게 될 것이었다. 가이드는 기념비에서 대해 짧은 설명을 늘어놓고는, 태극기를 하나 꺼내 관광객들에게 쥐어 주었다. 일렬로 늘어선 여행객들은 순서대로 태극기를 펼쳐 들고 비를 배경으로 기념사진 촬영을 했고, 사진 찍기를 마친 이들은 추운 날씨를 탓하며 곧바로 버스로 들어갔다. 먼발치에서 컨베이어 벨트처럼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스스로 선택한 일정이었음에도 무언가 외톨이가 된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 시간을 걸어 겨우 찾은 이 곳을, 저렇게 쉽게 찾아올 수 있는 방법도 있었겠구나.


바람이 거세게 불어 머리가 휘날렸다. 신한촌 기념비를 배경으로.


타국에서 살아남는 일에 힘겨웠던 그네들도

생존도 어려운 마당에 이 추운 곳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독립의 꿈을 잊지 않았던 그들도

만주와 연해주와 상해와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성공이라 할 만한 어떠한 것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아야 했던 이상설도 아마


외톨이가 된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생각했다. 버스가 떠나고, 나 또한 셀카봉을 길게 뽑아 기념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검은 마스크 위로 입 주변을 따라 입김이 얼어붙은 성에가 가득 낀 채였다. 휴대폰이 방전되지 않도록 품에 잘 넣은 뒤에 다시 블라디보스토크의 시내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계속>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로 돌아가는 길, 녹초가 된 몸도 녹이고 폰도 녹일 겸 따듯한 커피 한 잔을 시켰다. 카페의 온기에 머리카락도 녹아 젖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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