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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Dec 27. 2021

<마리카의 장갑>, 따뜻한 온기를 전하는 동화

<츠바키 문구점>으로 인상 깊었던 오가와 이토의 예쁜 동화 한 편을 읽었다. 제목은 <마리카의 장갑>. 태어난 순간부터 엄지 장갑과 함께 시작해, 살아가는 내내 장갑과 함께, 마지막 순간에도 장갑과 함께 하는 '루프마이제 공화국'이라는 나라의 소녀 마리카의 조금은 특별한 인생 이야기라고 하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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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첫 장면은 어느 해 크리스마스 즈음, 할아버지 할머니와 엄마 아빠, 그리고 삼 형제가 오손도손 살아가는 가정에 막내 여동생이 태어나는 날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기다리던 딸이, 여동생이 찾아와 준 기쁨이 가족들에게는 가득하다. 그리고 고심 끝에 아이의 이름을 '마리카'라고 지어준다. 할머니는 정성스레 뜬 엄지 장갑을 조그마한 마리카의 손에 끼워주며 깊은 사랑을 표현한다. ​


마리카는 그렇게 사랑으로 잘 자라나고, 어느 소년을 사랑하게 되고, 그리고 그들은 아름다운 가정을 이룬다. 자연 속에서 깊이 감사하며 누리며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아직 죄를 짓지 않은 에덴동산의 두 사람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루프마이제 공화국은 곧 '얼음제국'의 식민지가 되고, 행복하게 살아가던 마리카와 야니스(남편)는 야니스가 전쟁에 징집되어 생이별을 하게 된다. 결국 그들은 (살아서는) 다시 만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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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간단히 내용만 요약하기에는 동화가 너무 아름다워서 미안할 정도지만 또 구구절절 다 이야기를 토해 놓을 수도 없어 읽기를 권해드린다. 이 동화 속 '루프마이제 공화국'의 실제 배경은 '라트비아 공화국'이라는, 발트 3국에 속하는 나라다. 당연하겠지만 '얼음제국'은 러시아. 라트비아는 1991년에야 완전한 독립을 이뤘다고 한다. 작가 오가와 이토가 이 나라를 여행하고 너무도 인상 깊어서 동화를 쓰게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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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를 다 읽고 나니 지리 교과서에서만 봤던 - 발트 3국 외우느라 애썼음- 나라에 어찌나 가보고 싶든지. 마리카를 닮은 할머니들이 보고 싶어 졌고, 실제 엄지 장갑이 가득 들어있는 상자를 보고 싶었다. 이 나라의 여인들은 결혼할 때 혼수로 상자 가득 엄지 장갑을 넣어가야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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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더 인상 깊었던 구절들이 있었는데, 마리카가 태어나던 날, 숲으로 크리스마스를 위한 나무를 얻으러 가면서 호두 몇 알을 주운 아빠가 삼 형제에게 질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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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호두를 삼형제가 셋이서 사이좋게 나눠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나이 순서대로 나눠 먹어요!

둘째가 대답했습니다.

- 형은 몸집에 크니까 많이 먹고, 막내는 몸집이 작으니까 조금 먹어요. 나는 그 중간 정도 먹으면 돼요.


첫째와 막내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빠는 첫째와 막내에게도 대답해보라고 말했습니다.


- 셋이 똑같이 나눠 먹어요!

막내가 천진난만하게 대답했습니다. 나이나 몸집에 상관없이 삼분의 일씩 먹는다는 이야기입니다.


- 그게 바로 평등이라는 거야.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정의란다.

아빠가 조금 어려운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말없이 듣고 있던 첫째가 입을 열었습니다.

- 막내가 가장 많이 먹어야 해요. 왜냐하면 아직 어리니까요. 그리고 둘째는 조금, 큰형은 그냥 참아요. (중략)


- 참지 않아도 돼. 큰형도 조금은 먹고 싶지 않겠니?

하지만 정의란 바로 그런 거란다.

세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렴풋하게나마 '평등'과 '정의'의 차이를 이해한 것입니다.


정의란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



아아, 나 또한 '평등'과 '정의'의 차이를 비로소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동화의 첫 장면에서 나오던 이 대화는 이 동화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할머니가 된 마리카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다시 등장한다.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마리카다운 장면으로. ​



++++++++++


마리카가 다섯 살 때쯤입니다.


오빠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 가문비나무를 베러 숲으로 가는 도중에 큰 오빠가 마리카에게 물었습니다.


- 이 호두를 우리 넷이 사이좋게 나눠 먹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니?


마리카의 발 밑에는 호두가 한알 떨어져 있었습니다. 마리카는 곧바로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 땅에 심을 거야!


오빠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하지만 마리카는 자신만만했습니다.

-호두나무가 자라서 호두가 열리면 다 같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잖아!


++++++++++



나도 마리카에게 감탄하고 말았다. 마리카는 다섯 살 때 외쳤던 그 고백 같은 인생을 정말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마리카의 인생이 아름답게 마무리된다. 커다란 호두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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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참으로 잘 어울리는 동화였다. 루프마이제 공화국의 엄지 장갑이 상징하는 건 결국 사랑하는 이의 따스한 손의 온기. 사람은 사람뿐만 아닌 온갖 종류의 생명들과 함께 온기를 주고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마리카의 삶을 통해 깊이 느끼게 해 주는, 저자의 마음이 깃든 선물 같은 책이었다.

그래서 마리카를 그려보았다.

Illustrated by 해처럼




따스한 온기를 담은 이야기를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추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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