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읽는 중입니다
책 읽기가 가져다주는 사유는 물 주기 같다. 초록의 식물이건 콩나물시루건. 초록이 물 주기는 지금 체험하고 있고 콩나물시루 물 주기는 아주 먼 옛날 엄마가 하던 것을 바라보던 과거의 기억이다. 물은 통과해 버리는 것 같으나 반드시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은 식물의 ‘성장’으로 시각화한다. 끙끙대며 읽었던 책은 반드시 내 안에 흔적을 만든다. 시각화는 모르겠지만 어느 시기가 지나고 나면 ‘아!’ 하는 시점이 있다. 몇 개의 어휘와 개념들이 내 안에서 자라 있는 것이다. 물론 식물과 콩나물과는 달리 꽤 많은 시간의 층을 필요로 하지만.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중에는 알랭 콘이라는 수학자의 소설을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열적 시간’을 설명하기 위한 것 같다. (사실 열적 시간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 SF소설 속에서 샤를로트라는 주인공은 잠깐 동안 시간 너머의 세상을 보게 된다.
나는 특정한 순간이 아니라 나의 존재 일반에서 내 존재의 세계적 비전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져봤다. 나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공간에서 내 존재의 유한성’과 ‘많은 분노의 원천인 시간에서 내 존재의 유한성’을 비교해 볼 수 있었다. 시간의 등장은 정신적 혼란, 근심, 두려움, 소외의 근원인 침범과도 같았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속에서 언급된 소설 중
나는 스스로 ‘샤를로트’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는 가정하에 상상해 본다. 그런데 그가 (혹은 저자가) 느낀 것과는 정반대의 것을 느꼈다고 하면 이상한가. 시간 안에 산다는 것은 마치 손쉽게 호흡하고 먹이도 제때 먹을 수 있는 적절한 크기의 어항 속 물고기 같은 것 아닐까. 산소가 뽀글뽀글 나오고 불이 꺼지면 잠들고 불이 켜지면 잠에서 깨는, 온도도 적당하며 수질도 잘 관리되고 있는 적절한 크기의 어항이다. 그러나 시간이 제거되고 ‘영원’ 속으로 던져진다는 건 마치 어항에서 튕겨져 나와 거대하고 경계가 없는 바닷속으로 던져진 물고기 같은 것이다. 시간이라는 경계가 사라져 버린 영원과 마주한 물고기는, 과연 자유로울까?
주위가 모두 하얗기만 한 어떤 세계에 내가 던져졌다. 그곳에는 어떠한 경계도 없다. 끝도 없이 주변의 모든 것이 ‘흰’ 어떤 공간. 어디로든 끝없이 갈 수 있고 머물 수 있지만 주변은 언제나 똑같은 풍경이다. 머리 위도 발아래도 눈앞도 뒤통수도 모두 하얀. 그것이 언제까지고 이어지는 풍경. 시간이 제거된 세상을 상상할 때 나는 오직 그 하얀 방, 끝도 없고 경계가 없는 하얀 방을 떠올리게 된다. 가없는 무한의 공간, 통제 없는 무한(혹은 우주)에 던져져 떠다니는 존재. 그것이 시간이 제거된 세상에 대한 나의 이미지다. 핀터레스트에서 비슷한 이미지를 찾아본다면 이런 것.
소설의 표현 그대로 해보자면, “시간의 등장은 제거는 정신적 혼란, 근심, 두려움, 소외의 근원인 침범과도 같았다.”
딱이다.
허나 나 역시도 시간의 슬라이스를 넘어선 광경을 보고픈 욕구 역시도 무척 강하다. 물론 아주아주 나중에 그렇다는 이야기지만.
계속 읽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