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게
때로 나는 내가 읽은 글자들의 총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직설적인 표현이면서 동시에 직유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글자들’은 대개의 경우 액면 그대로의 글자들이지만, 때로는 어떤 선율이기도 하고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기도 하며 또는 아직 결정되지 못한 이미지이기도 하다. 읽어내는 순간 그것은 섭취한 음식물들처럼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불필요한 것들은 배출되고 절실한 것들은 남겨진다. 그런 방식으로 글자들은 조심스럽게 나를 구성하는 신체 조직의 일부가 되어간다.
많은 이들이 담배를 피우거나 껌을 씹거나 손톱을 물어뜯거나 하는 행위들을 할 때,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안도를 얻기 때문에 지치지도 않고 똑같은 습관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비슷한 이유로 내 경우는 지금껏 ‘읽는 행위’를 해왔다.
남미의 문호 보르헤스는 말년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되자 책 읽어주는 사람을 고용해 책을 읽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두려워졌던 것은 이후에 시력에 문제가 생겨 책을 읽을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종이로 된 책을 읽다가 전자책에 적응하는데도 꽤 긴 시간이 걸렸던 것을 생각해볼 때, 문장들을 그저 듣는 것 만으로 '읽기 욕망'이 충족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적응하는데 꽤 많은 심리적 품이 들 것이라는 우려도 함께.
어린 시절 책을 읽으며 매번 놀라웠던 것은 글자들의 조합만으로 이루어진 평평한 세계가 머릿속에서 엄청난 스케일의 입체적 영상으로 그려진다는 사실이었다. 그 세계는 잠시 책을 닫아두고 다른 것들을 하다 돌아와 다시 읽기 시작해도 흐트러지거나 와해되지 않았다. 덮으면 하나의 보잘것없는 종이들의 묶음일 뿐인데 펼치고 그것을 읽는 순간 누군가 말을 걸어오고 그들과 함께 같은 곳을 걷거나 뛰고 있는 나를 체험한다는 사실이 어린 나를 흥분시켰다. 텍스트로 이루어진 하나의 집에서 책의 화자와, 등장하는 이들과 관계를 만들어가며 대화를 나눴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렇게 체험한 텍스트 욕망이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다. 셀 수 없는 글자의 조각들이 개념화되어 세포의 일부가 되고 시간의 덧칠을 통해 현재의 나로 자라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은 책은 시간 속에서 잊힌다. 밤새워 읽으며 열광했던 문장들, 나로선 영원히 이렇듯 멋진 문장을 쓸 수 없을 것 같아 절망하게 만들었던 그 감동들도 오래된 물건들의 빛이 바래듯 기억에서 말끔하게 사라져 간다. 이럴 바엔 왜 끊임없이 새로운 책을 읽는가, 똑같은 책을 반복해 읽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하나의 책이 자신의 인지 영역 안에서 사라졌다고는 해도 그 책을 읽기 전과 후의 나는 미세하게 '다른' 나가 아닐까. 읽는 동안 그리고 읽고 난 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떠한 화학작용이 일어나고 문장들은 뇌의 주름 안에 자리를 잡고 안착한다. 어떤 것은 영원히 숨어버려 완전히 사라지지만 어느 것은 생명을 얻어 다른 무엇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아를 이루는 한 조각의 퍼즐 같은 것으로.
때로 내가 펼친 가공의 이야기로 인해 영혼이 깊이 위로받는다고 느낀다. 그것은 단지 플롯이나 스토리만이 아닌 그 가공을 떠받치는 얼개들, 즉 문장들의 힘이라는 것을 안다. 누군가는 그것을 쓰고 익명의 누군가는 그것을 읽는다. 나 역시 그 이름 없는 독자들 중 하나일 뿐이지만 아무리 많은 이들이 같은 문장을 읽는다 해도 내가 느끼는 떨림과 감동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무한의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존재를 끌어안고 사는 것’에 대한 의문들, 그에 대해 희미하게나마 유추해 낸 답변들을 수많은 국적과 언어로 풀어낸 작가들의 흔적들을 더듬어가며 나 자신이 갖고 있는 것과 맞추어보는 작업. 그것이 만들어내는 작은 쾌감들이 내가 온전히 나임을 일깨운다. 네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곧 텍스트의 일부이며 나의 일부가 문자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안에서 눈부신 기쁨을 발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