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의 발견과 코로나 은혜

소소하게

by 해처럼


하루에 한 번은 꼭 해야 한다고 정해놓은 것, 그 '반복'의 루틴을 만들어놓으면 하루는 그것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때로는 내가 '그것'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가족들에 관련된 것을 제외하고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한 반복이라면 '매일 글쓰기와 걷기 운동'. 이 두 가지다. 무언가 66일을 지속적으로 하게 되면 그것을 뇌와 몸은 습관으로 받아들이게 된다고 하던데 이제 거의 일 년이 되어가니 습관의 반열에는 이미 올랐다. 이 두 개의 루틴 중에서 쉬운 것은 몸을 움직이는 것.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운동기구에 오르거나 밖으로 나가 걸으면 된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은 매일 글을 올리는 일이다.


원체 끄적끄적 되도 않은 글을 쓰는 걸 인생의 楽으로 생각해왔고 날이 덥건 춥건 슬프건 외롭건 모든 것을 단어화 혹은 문장화시킴으로 스스로 위로하고 치유하며 살아온 것은 '기이한' 일이었을까. 어젯밤에도 딸은 말하길 '엄마는 글 쓰는데 딱 맞는 성격이야'라고. 코로나 유행으로 인해 모든 만남이나 관계가 단절되는 이 상황이 방학처럼 느껴진다고 했더니 돌아온 말이다. 그런 성향의 인간임에도 매일 오픈 글쓰기를 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이 일 년 깨닫는 시간이 되고 있다.


다른 것 보다도 이런 시답잖은 생각의 파편을 누에가 실을 잣듯 끄집어낸다고 하여 무슨 비단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닌데 싶은 마음. 그러니까 언제나 그 '시답잖음'과의 신경전이다. 그럼에도 어쩌다 몇 년 전 글을 읽어보게 되면 그때 비로소 아, 이래서 인간은 기록이란 걸 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곳에 과거의 내가 문장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문장은 사진보다 훨씬 더 나에 가깝기 때문에 한 순간보다 확실하게 과거의 나와 마주할 수 있다.


'나'와의 조우라는 측면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자면, '자아'라는 개념을 발견한 것은 데카르트라고 한다. (자아의 발견을 '발견'이라고 해야 할지, '발명'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둘 다인지?) 아마도 그것이 발견되기 전에는 '나'를 인식하는 사람은 특권계층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의 나로서는 어떻게 해봐도 '자아' 즉 '나'를 통하지 않고는 제대로 사고를 할 수가 없는데 과거의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사고했는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다. 다만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다든가 태어난 신분이 종이면 그저 종으로서의 삶을 당연하게 주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가다 죽음을 맞는다든지 하는 모양새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아기가 태어나면 자기 자신과 엄마(혹은 양육자)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다 스스로 '나'라는 존재에 눈을 뜨면 일단 처음 튀어나오는 말은 '싫어!'이고, 이어서 '내가!’ 이 두 말이 세트로 흘러나온다. 이것은 소규모의 자아 발견이 아닐까 싶다. 그러다 사춘기가 되면 대규모의(?) 자아 발견의 시간이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며 밀물처럼 밀려드는 것이다. 그러한 성장과정을 거친 '나'들이 온세계에 가득가득하다. 세계의 산업은 사람들의 자의식으로 성장하고 운반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사람은 '코로나 은혜'로 보기 싫은 사람들을 안 보게 되어 마음이 정화되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고양이 세 마리를 홀로 키우는 한 고양이 집사는 재택근무로 야옹이들과 함께 하루를 보내는 일상에 만족하는 듯도 보인다. 반면 뉴스에서는 최근 여성들의 자살이 늘었다고도 하고, 실제로 얼마 전 일본의 유명 여배우가 자살하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들이 바람을 타고 전해져 온다. 핑크빛처럼 보여도 사실은 핏빛이었던가, 사람의 인생은.


모쪼록 이 매일이 모두에게 너무 괴롭지 않기를, 발견이든 발명이든 '나'를 발견해낸 순간부터 그를 사랑해주지 않으면 어느 날 잃어버리고 마는 거니까. '코로나 은혜'를 애써 한 두 개쯤 생각해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 아니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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