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에 선 자들

사유의 정원에서

by 해처럼


경계면에 서보거나 경계면을 건너보는 경험은 상황에 따라 상당한 에너지와 피로감을 경험하게 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이쪽과 저쪽을 모두 체험해볼 수 있기에 '비교’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초등 6학년 때 지방에서 경기도로 전학을 갔다. 봄소풍을 앞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연극 콘티를 짜다가 갑작스레 전학을 가게 되었고, 옮겨온 학교는 이미 봄소풍을 다녀온 터라 내 인생에 초등 6학년의 봄소풍이란 것은 영원히 삭제되었다. 전학 온 첫날 아이들은 내 이름을 듣고 까르르 웃어댔고 (내 이름은 그렇게 웃어재낄만큼 코믹한 타입은 아니지만 특이한 이름이긴 하다) 그것은 별로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어리바리 시골아이로 보이고 싶지 않아 열심히 이른바 ‘서울말’을 연습했다. 나에게 서울말이라는 것은 끝을 살짝 올리며 ‘~~~니?’ 혹은 ‘~~~야.’ 하는 식으로 마무리를 하면 대충 서울말로 들리지 않을까 싶었던지라 그 닭살스런 ‘~~~니?’를 애써 입안에서 기름기를 느끼면서 낯선 반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살던 지역에서는 ‘~~냐?’와 ‘~~여’ 등등으로 말미를 닫고 끝은 길게 내린다. 완전 반대다)



​수업이 끝나고 다 같이 청소를 하는데 내가 맡은 부분은 특정 도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최대한 끝을 올리며 “근데 수대는 어디에 있니이?” 하고 물었다. 그러자 아이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수대가 뭐야?” 하고 되묻는 거다. 앗 무식한 아이들이 수대도 모르나 싶어 무슨 말로 설명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는데 어떤 애가 수대를 갖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거라고, 저걸 어디서 갖고 오는거니이~? 했더니, “바께스?” 라는 신박한 명명을 하는 거다. 내가 아는 비슷한 말로는 ‘박카스’ 밖에는 없었는데...... 아무튼 수대는 바께스, 대걸레는 마대자루였다. 이 언어의 장벽이라니.



​나도 모르게 조금씩 적응을 하여 몇 달이 되지 않아 수월하게 '서울말'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봐야 한국이라는 국경 안의 일들이니 표준어와 사투리쯤은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것이다. 비슷한 집단 두 개를 동시에 경험했기에 이 선생님과 저 선생님을 비교할 수 있었고 지방과 수도권 아이들의 특징도 나름대로 비교할 수 있었다. 지방은 전학 오는 아이들의 수가 지극히 적은데 반해 수도권은 내 뒤로도 전학생이 꾸준히 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얼굴색이 달랐다. 남자아이고 여자아이고 수도권 하늘의 자외선 배출량이 혹시 더 적었던 걸까. 애들이 약간 더 하얗다는 생각을 했고, 성격은 조금 더 못됐구나 싶었다. 이것이 내 초등 6학년의 재미없었던 소회.



그 후로 크고 작은 경계선 변화는 있었지만 삶을 뒤흔드는 정도는 아니었다. 새롭고 강한 변화는 결혼 후 일어났다. 일단 시댁이라고 하는, 우리 집과 다르지만 내 삶에 훅 들어온 한 가정을 경험했고, 그리고 일본이라는 나라를 경험하게 되었다.



일본에서의 삶은 끊임없이 거대한 또 다른 한축인 '우리나라였더라면'을 생각하게 하고 마음속에서 크고 작은 비교를 하게 된다. 때때로, 이 나라가 내 나라를 지배하던 시절에 (이 사람들 성향을 통해 예상해볼 때) 지독히도 집요하게 괴롭혔겠구나... 싶다. 친절한 일본인들을 훨씬 많이 만나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지만 그것과 역사는 별개다. 역사적 관계가 그다지 밀접하지 않은 나라였다면 좋아하게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관공서에 걸려있는 핏방울 같은 일장기를 보기만 해도 반발심이 후끈 오르는 것은 반일 교육의 작용인가 반작용인가 부작용인가.



​경계면에 서본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결국은 어느 쪽으로 흡수되기 마련인 걸까. 그러고 싶지는 않다. 경계면에 서서 이쪽과 저쪽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조금 외롭긴 할지라도. 의미를 잊어버리지 않기가 경계면에 있는 자의 지침이겠지. 어쩌면 모든 인류는 다 '경계선에 선 자들' 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서 두 개의 커다란 개념을 자기 안에 공존시킨 채 위태위태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니까. 내가, 우리가 여기 서있는 뜻은 무엇인지 항상 미묘하게 감지하며 존재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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