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온 지 13년을 채워가고 있는 나날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아닌 원래 이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여긴 지 오래다. 이런 것도 역지사지라 할 수 있는 걸까? 낯선 외국어에 슬슬 익숙해질 법도 한데 오히려 '한국말 욕망'은 날이 갈수록 더 깊어지고 질겨진다. 무언가 끄적이지 않았더라면 진즉 짐을 싸들고 귀향했을지도 모를 와중에 곁에 쌓여있거나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물들을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하니, 사물들 또한 나를 무심히 바라보기 시작한다.
'물건'을 염두에 두고 주변을 살펴보니 온통 써야 할 것들 투성이다. 퀼트에 빠지면 집에 있는 모든 천들을 다 조각내서 다시 이어 붙이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처럼 모든 물건들과 기억들과 느낌들을 다 조각조각 내어 새로운 방식으로 이어 붙이고 싶어 지는 마음을 어찌할 바 모르겠다. 그런 마음으로, '뭐든지 물건' 연작을 시작하려는 참이다. 우리 모두에겐 사연 없는 물건이 없고, 감정이 깃들여있지 않은 물건도 없는 것이니까.
결국 안경을 써야 하는 건가, 하고 최초로 생각했던 것은 고1 겨울방학을 앞두고 있던 어느 수학 시간이었다. 초록색 칠판에 하얀 분필로 잔뜩 쓰여 있는 숫자가 두 개로 겹쳐 보이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나는 그날로 즉시 아빠와 함께 동네 안경점에 가서 유행이던 검은색 뿔테 안경을 맞췄고 그 후로 대개 칠판을 봐야 하거나, 텔레비전 혹은 스크린을 볼 때만 안경을 착용했다. 당시만 해도 시력이라면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 평생 안경이나 렌즈를 얼굴 위에 옵션으로 달고 살게 될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대학 3학년 무렵까지도 고교시절의 습관대로 여전히 어딘가 먼 곳을 필연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피치 못한 경우에만 안경을 착용하던 나는 선배들이나 동기들의 인사를 무시한다는 항의를 받기 시작하던 즈음에야 학교 안의 안경점에 찾아가 콘택트렌즈를 구매하게 되었다. 콘택트렌즈를 처음 눈 안에 '쑤셔넣'다시피 하고 화장실 거울로 얼굴을 본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주근깨가 차지하는 면적이 예상보다 상당히 광활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 듯 메이크업 베이스를 처음 바르고, 거기에 립스틱을 바르고, 한술 더 떠 서클렌즈를 착용해 눈을 더 커 보이게 하는 식의 지극히 ‘가식적인’ 삶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모든 것은 콘택트렌즈가 촉발한 일련의 흐름으로 보이지만 실상 근원은 ‘안경’ 임에 틀림없다.
다시 안경이 일상의 도구가 되고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얼굴에서 안경을 떼 내지 못하는 생활이 시작된 것은 아이를 낳은 이후였다. 어떠한 가식도 허영도 스스로 놓아버렸던 새로운 리그의 경계가 출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허영과 가식이 나를 떠난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물적 증거라 하는 것이 내게는 안경이라 해도 무방하다. 최근에는 시력이 좋으면서도 패션을 위해 안경을 멋으로 걸치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던데, 솔직한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것이다. 귀찮은 걸 ‘굳이 왜?’
살면서 가장 갖고 싶다고 생각했던 안경이라면 매트릭스의 모피어스가 눈에 붙이고 다니던 조그맣고 동그란 선글라스인데, 첨단 미래 사회에서만 가능한 확기적인 발명품으로 보였다. 모피어스의 그 선글라스는 콧등에 걸거나 귀에 거는 스타일이 아닌 눈 앞에 착 붙이는 안경으로, 대체 원리가 무언지 알 수가 없어 접착제를 쓴 건가 단순히 자석인가 하는 등등의 호기심을 자아냈다. 아침에 눈을 떠 안경이 코에 걸리는 순간부터 콧등을 짓누르는 안경의 무게가 주는 약한 통증에 시달리는 나로서는 참으로 탐이 나는 물건이 아닐 수 없었다.
많은 투덜거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안경을 얼굴에서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까닭은 눈의 편안함 때문이요, 수술대에 누울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뿐 아니라 왼쪽과 오른쪽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는 대칭의 미학을 지닌, 나름의 매력을 지닌 흔치 않은 물건이 안경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안경을 벗은 채로 뿌연 안개가 낀 것 같은 세상을 바라보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더러운 곳을 청소할 때 일부러 안경을 내려놓고 쓱쓱 치우면 그것이 그다지 더럽다고 느껴지지 않는 효과처럼 마치 꿈이라도 꾸듯 세상의 추함과 악함이 가려져 청결하고 순수해 보이는 착시현상 속에서 그냥 그런 채로 살아가면 어떨까. 하지만 역시, 조금 추하더라도 명료하게 진실을 보는 쪽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다시 벗어둔 안경을 얼굴에 걸고 나를 바라보는 세상을 똑바로 쳐다보게 된다. 그것이 어떤 형체를 하고 다가오는지 분명히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