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기기가 멈추는 사건은 대체로 느닷없이 찾아온다. 아무런 예고도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그 ‘운명의 순간’이 온다. 바로 어제까지도 이런 일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제 몫을 해내고 있었던 그것은 오늘 별안간 ‘유명을 달리’ 한다. 달콤 씁쓸한 인사의 말도 없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이별의 여운도 풍기지 않은 채 뚝 심장이 멈춘다. 그러고는 미동도 하지 않고 사물로서 낯설게 존재한다. 전원을 연결해주어도 조금도 움찔하지 않는 전자기기는 그저 하나의 사물이다. 그것을 통해 이루어져야 마땅할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더 이상 자신의 주인과 소통하려 들지 않는다. 껍질 속에 스스로 갇혀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근 자폐의 기계가 되어버린다.
바나나 셰이크를 만들 요량으로 재료를 준비한 뒤 믹서기에 전원을 연결하고 스위치를 누른 순간, 이미 그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재차 버튼을 눌러봐도 아무런 대답이 없는 믹서기를 붙들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네 개의 바나나들은 이미 노란 껍질 옷을 벗은 채 수줍게 우유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난감한 상황이다. 함께 한 지 11년. 얼마 전 호흡이 멎은 전자레인지에 이어 올해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두 번째 기기다.
11년이면 작고 어린 강아지가 노견(老犬)이 될 만큼의 시간이다. 기르던 애완견이 저세상으로 간 것만큼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섭섭한 마음이 피어올랐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 나름 꽤나 최신 기기였던 데다 디자인까지 날렵하여 한눈에 마음에 들었다. 한낱 고체에 지나지 않던 수 개의 바나나들이 그를 거쳐 액체로서 짧은 생을 마무리하곤 했었지. 한 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수없이 많은 단단한 덩어리들을 성실하고도 날렵하게 갈아버리던 그였다.
동물이나 식물의 죽음과 다르게 그들의 죽음은 고요하고 평온하다. 추함도 없고 그 어떠한 부패의 냄새도 풍기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침묵할 뿐이며 나로선 불편할 뿐이다. 인간의 죽음을 육체와 영혼의 분리라고 단순하게 정의한다면 전자기기들의 육체는 기기의 본체이고 그들의 기능이 곧 영혼은 아닐까. 영혼 없는 인간이 껍데기에 불과하듯 기능이 사라진 기기들은 영혼이 소멸된 사체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죽은 전자기기들의 영혼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갈 바를 알지 못하여 구천을 떠도는 것일까. 주인에게 사랑받은 것은 얌전히 소멸되고 소홀히 대했던 것은 원귀가 되어 집 주변을 떠돌고 있다면 어떻게 하지? 혹여 긴 세월 함께하는 동안 그들을 박대하지는 않았던가. 다른 집의 최신 믹서기나 청소기를 마음속으로 부러워하진 않았는지 참회해야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영혼이 떠나간 믹서기의 차가운 바디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 보면 가구들은 식물에, 가전들은 동물에 비하는 것도 일견 타당하지 않을까. 미동이 없는 가구들은 그저 놓인 자리에서 묵묵히 소임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그에 비해 전원을 연결하면 기동 하는 가전제품들은 ‘움직임으로’ 소임을 한다. 선풍기는 힘차게 날갯짓을 하여 바람을 만들고, 텔레비전은 소리와 영상을 끊임없이 재생한다. 그러다 보니 일단 그것들이 별안간 제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않으면 어쩐지 죽은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원래부터 미동 없이 서있던 가구들이 못쓰게 되었다거나 망가졌다거나 하면 특별히 생명이 사라진 느낌이 들지 않는데 비해 전자기기들은 그렇지가 않다. 전기나 다른 수단에 의해 피동적으로 움직이던 것들 일지라도 막상 움직이지 않는 정지 상태가 되면 생명이 꺼진 듯 아찔한 느낌이 든다.
삶의 시간들이 하루하루 포개어지면서 내가 그곳에 없었더라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수많은 이들을 조우하게 되는 것처럼, 나는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기기들을 만나게 될까. 손에 쥔 스마트 폰 화면에는 벌써부터 최신의 디자인과 신기능을 자랑하는 믹서기들이 면접을 보기 위해 모여든 지원자들처럼 줄지어 대기하고 있는 와중에, 나는 떠나간 믹서기의 영혼을 위로하며 아직 액체가 되지 못한 바나나가 통째로 들어있는 우유 잔을 들이켜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