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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Dec 14. 2020

읽기의 지구력

사유의 정원에서

책이라는 것은 일단 전체 페이지의 50%를 넘어서는 순간이 오면 '다 읽은 거나 다름없습니다'라고 말해버리기에는 약간 오버스러운 억지일 수 있겠지만 다르게 말하면 '다 읽기에 이제 무리는 없다'는 의미일 수 있다. 등산으로 치면 정상에 오른 것이며(내려오는 것만 남은) 마라톤으로 치면 20킬로미터 정도 뛴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반백년이요, 초등학생으로 치면 4학년 진입이다.


50퍼센트를 넘겼다 함은 작가의 문체에 일견 적응했다는 뜻이고 그 작가를 내 내면이 '견딜만하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때로는 ‘견딜만하다’를 뛰어넘어 ‘너무 좋아 미치겠다’가 되기도 한다. 등장인물의 면면이나 책이 애써 말하고자 하는 테마랄지 하는 '그것'을 오케이 알겠어, 하며 수용하겠다는 뜻이 된다. 그 50이 차기까지 독자는 작가가 창조하거나 제시한 그 세계를 이루는 법칙이랄까 규율이랄까의 간을 보면서 이에 견디고 적응하는 시간으로 삼는 것이다. 계속 진행할지 말지 역시도 이 50이 차오르는 시간 동안 결정된다.



정말이지 이런 것은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과도 비슷하지 않은가.



​사람을 한 권의 책으로 비유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한 권의 책을 한 사람으로 비유하는 말도 있다. 이런 말들에 진심으로 공감하게 된다. 필터를 전혀 거치지 않은 채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어느 시점이 되자 망설여졌다. '원래' 그런 종류의 인간이기는 하지만 이 즈음에 이르러는 더욱 심해졌다. 이러저러한 필터를 거치지 않고 쌩으로 만나게 된 인간관계는 조리하지 않은 음식처럼 잘 소화되지 않거나 복통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겨우 알게 된 것이다. 한 번, 두 번 만남이 있다 보면 몇 개의 필터를 거치게 되고 그렇게 서서히 50퍼센트의 능선을 넘어서면 끝까지 마음의 주소록에 저장된다. 때로는 50퍼센트를 넘어서면서부터 더욱 아껴 읽는 책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아껴 만나는 사람도 생기는데, 이는 생의 엄청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만난 보석 같은 사람들, 책들과는 계속해서 교류를 쌓아갈 수 있다. 지나간 시간과 뱉어버린 말들은 돌이킬 수 없지만 좋은 책은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고, 좋은 사람은 서로 더 좋은 영향을 주고받아 진국 같은 관계가 된다. 그러고 보면 독서를 취미로 삼은 사람들 혹은 책을 둘도 없는 친구로 삼은 사람들이란 그 50의 능선을 넘는 순간과 비교적 빈번하게 조우했던 사람들임을, 그 경험들이 오버랩되고 오버랩되어 있는 사람들임을 짐작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맛'을 아는 사람들끼리는 쉽게 대화가 되고 벗이 될 수 있는 것이겠지.


물론 표면적인 그 '맛'만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이야기가 술술 통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저 읽는다는 행위 자체만 공유할 뿐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도 꽤 있다. 읽기 행위가 그저 욕심에 그치는 사람도 세상에는 상당히 분포되어 있는 것이다. 마치 컬렉션을 자랑하는 것처럼. 언제나 그런 사람을 주의하고 있고, 스스로에게도 주의를 주고 있다.



가급적 고전 읽기와 현대의 쏟아져 나오는 책들을 균등하게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고전들이 머금고 있는 묵직한 정신의 언어와 지금 이 순간을 흐르는 시대의 언어들 둘 다 나의 내부를 통과하게 하고 싶다. 그러한 것들이 내 안의 50 능선을 매번 훌쩍 뛰어넘어 내달릴 수 있는 읽기의 지구력을 갖추고 싶다.


ps1. 지구력: 오랫동안 버티며 견디는 힘(국어사전)

ps2.그림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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