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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Dec 25. 2020

언어는 존재의 다람쥐

소소하게

읽고 있던 책의 저자가 초딩 5학년 무렵 선생님이 글쓰기 숙제를 내주셨단다. '글쓰기 주제는 자유예요. 모두 열심히 써오도록' 하는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은 다양한 주제로 마음껏 글을 써왔는데 자신은 '자유'에 대한 글을 써갔다고. 자신을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초리가 묘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최근에 딸의 학교에서도 '한국어 글쓰기+말하기 대회'라는 것을 했는데 (외국에 있는 한국학교라서 그런 대회들을 종종 하곤 한다) 주제는 역시 자유였다. 딸은 '라면 예찬' 비슷하게 라면에 대한 이야기를 썼는데, 아이의 친한 친구 하나는 글쎄 통일에 대해서 썼단다. 오 마이 갓! 통일에 대한 건 평소 1도 생각하지 않는 열서너 살의 아이들에게 통일에 대한 글쓰기 숙제를 내주는 이유는, 너네 그런 것도 인생에서 한번 생각해봐야 해~라는 교육적 취지일 터인데, 이번에는 그런 거 말고 니들 쓰고 싶은 이야기 가볍게 써 봐~ 의 취지였을 '자유' 글쓰기에서 그 아이는 통일에 대해 열심히 글을 썼다고 한다. <사랑의 불시착>을 보고 난 감상문 비슷하게 흘러갔다던가 뭐라던가 :)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참으로 멋진 말을 남겼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완벽한 시처럼 내 내면을 후벼 판다. 언어는 존재의 집. 이 말을 떠올리면 아주 조그만 점 같은 크기의 물방울 입자에 하나의 글자가 잠들어있고 그것을 투명한 존재의 물방울이 감싸고 있는 장면이 떠오른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쓰려할 때, 나는 그 언어의 물방울들을 하나씩 세심히 끌어모아 하나의 형체를 만든다. 내가 끌어모은 말들의 물방울은 하나의 문장으로 연합하고 그 물의 경계는 사라진다. 그러니 내 말과 글은 나의 뜻이다. 나의 뜻대로 형체가 만들어졌다가 분해되었다가 하며 특정한 존재를 일군다. 그것이 즐거움이고 쾌감이다.



학교에서 글쓰기 숙제든 과제든 무엇이든 요구하는 것은 마음에 드는 일이다. 아이들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하나의 존재를 일구는 행위라는 것을 어쩌면 나중에는 알게 될지 모를 일이다. 통일에 대해서건, 자유에 대해서건, 라면에 대해서건, 엉킨 뭉텅이 같은 모호한 그것에 조각칼을 들이밀듯 자신의 말로, 글로 형체화해가며 자신만의 라면이며 통일이며 자유를 일구는 일이므로. (애들이 들으면 기겁할지도 모르지만)



어릴 적 글짓기 대회가 있으면 담임 선생님 추천하에 몇 번 나도 나가곤 했다. 사생대회와 글짓기 대회를 겸하곤 하던 그 대회는 고맙게도 평일 수업시간에 개최되어서 나는 빼곡 앉아있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네모난 교실을 벗어나 꽃과 나무가 있는 야트막한 산 같은데 앉아 열심히 글을 짓곤 했다. 사생대회라고 해서 사생결단이 나도록 글을 쓸 필요는 없었고, 적당한 열심으로 글자들을 주워다가 배치하는 그 작업이 마음 깊이 신났었다. 요즘에도 그런 대회가 있는지는 모르겠네.




겨울을 나려고 열심히 도토리를 주워 모으는 다람쥐처럼 머릿속에 흩어져있는 글자들을 주워 모아 문장 하나하나로 배치해가는 일은 테트리스보다 재미있는 일임을 그즈음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아마 요즘 아이들은 테트리스를 모르겠지? 갤러그 - 테트리스 - 1943 이것이 라떼는 말이야 게임 편력기. 오직 오락실에 가야만 할 수 있는 게임들이었음을.  허나 그보다 더 재미있는 오락이 글쓰기 놀이였음을 고백.



한국을 떠나 있으니 한국語가 더 각별하고 한국이란 나라가 더 각별한 것은 내가 그 일부이기 때문일까. 간곡히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한국에 가도 한국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어 멈칫해진다. 그것은 내 나라일까, ‘피라밋 꼭짓점 엘리트'의 나라일까? 판사가 검사의 수족인가 검사가 판사의 수족인가? 알 수 없다. 모호할 뿐이지만 내 눈에만 그럴 뿐 실체는 명확히 있겠지.


언어는 존재의 집인가 존재의 도토리인가, 언어는 혹시 다람쥐는 아닐까. 매일 쳇바퀴를 돌아도 지루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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