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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Dec 27. 2020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

읽기의 자율주행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순물이, 불순물 중의 불순물이 필요하다. 잘 알고 있듯이 땅도 무엇을 키워내려면 그래야 한다. 불일치, 다양성, 소금과 겨자가 있어야 한다. 파시즘은 이러한 것들을 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금하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너는 파시스트가 아냐, 파시스트는 모두가 똑같기를 원하는데, 너는 그렇지가 않아. 얼룩 하나 없는 미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 중에서)




프리모 레비는 화학자이자 시인이며 작가다. 이탈리아인이며 유대인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을 거대한 이데올로기에 반(反)하는 얼룩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구약성서의 <신명기>를 읽으며 프리모 레비를 떠올린다. 그가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엄청난 재앙을 받게 될 거라고 예고된 그대로 유대인들의 역사는 수없이 짓밟혔고 그리고 동시에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났다.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의 끔찍함을 겪으며 그가 믿던 하나님을 부정했던 것 같다. 다른 글들을 읽어봐야 하겠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는 그런 조짐이 보인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 중 하나였던 그는 이후의 삶에 적응하는 듯 보였지만 어느 순간 ‘돌연’ 자살을 택하고 만다.




제목이 좋았다. <주기율표>. 주기율표가 대체 뭐지? 싶으면서도 까마득한 학창 시절 얼핏 스쳐 지나간 단어 같기도 하다. 뜻을 가늠하기 어려운 알 수 없는 화학용어가 문외한에게는 어쩐지 완벽한 느낌을 준다. 그의 건조한 문체 또한 매력적이었다. 화학식을 설명하듯, 실험 결과를 보고하듯 건조한 어투로 이어져나가다가 주옥같은 문장을 몇 개 툭툭 뱉어내는 식이다. 그래서 한참은 지루하다가 잠깐 반짝 금을 캐다가, 또 말할 수 없이 지루하다가 진흙 속에 잠깐 진주...... 이런 식이다. 지루한 부분들을 읽으며 진주를 캐기 위해 진흙을 잔뜩 묻히고 걷고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수용소에서 갇혀있던 시간들을 술회하는 내용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이것이었다.


겨우 글씨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빛이 희미했지만 그래도 나는 쉴 새 없이 독서했다. 내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p197)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한 이유로 책을 읽지만 이것은 내가 들은 독서의 이유 중 가장 처절하고 가장 인상적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모든 일’을 겪고 포로생활에서 생환한 그는 이렇게 쓴다.
 



내 눈으로 보고 겪었던 많은 일들이 불처럼 마음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가깝게 느껴졌고 내가 인간이라는 것에 죄의식을 느꼈다.(p222)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견디게 해주는 것이 글을 쓰는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글을 쓰면서 잠시나마 평온을 느꼈고 내가 다시 인간이,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 순교자도 파렴치한도 성인도 아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 가정을 꾸리고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인간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p222)



그 기분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마는, 나 또한 슬픔이나 분노, 아쉬움 등의 버거운 감정들을 글로 다스리고 치유하는 경험을 긴 시간 해왔기에 감히 그 마음을 조금쯤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Primo Levi



그는 아마도 화학자로서 원소와 원소와 원소가 결합되어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는 ‘인간’이라는 원소의 결합 덩어리와 자신이 겪은 끔찍한 참상을 이끌어낸 주체인 ‘인간’이라는 존재를 포개어보며 자신의 의문에 대한 답을 풀어보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 미치광이 같은 역사의 날카로운 단면에 살과 영혼이 베이면서 아마 그 답을 찾기 위해 미궁을 헤맬 수밖에 없었을... 그를 비롯한 수많은 ‘생존자’들의 영혼이 한없이 가엾다. 그러한 역사가 다시는 그 어디에서도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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