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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Jan 07. 2021

세상 모든 이야기들

사유의 정원에서


어느 때부터인지 드라마나 영화 보는 일이 그야말로 '일'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졌다. 가공의 이야기를 접하는 것이 싫어서는 아니다. 소설은 곧잘 읽는 편이니까. 그러면 ‘왜 때문일까’, 생각해본다. 긴 영상물을 보기 위해서 그만큼의 긴 시간과 몰입을 부어 넣어야 하기 때문인 건가. 사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일은 의외로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잠깐 딴생각을 한다거나 씬을 놓치게 되면 이야기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구멍이 생긴다.



하지만 꼭 시간을 잡아먹는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영상물은 보는 이의 시간과 집중력을 탐욕스럽게 요구하면서 그저 자신이 이끄는 대로, 찍소리 말고 따라오라 명령하는 지배자 같다. 자신의 것이지만 아무것도 제어할 수 없는 꿈속에서 펼쳐지는 화면을 멀거니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뇌는 사고를 멈추고 제시된 이야기의 세계 속에서만 오갈 수 있다. 철로가 놓여 있는 장소만을 다닐 수 있는 열차처럼 말이다.



철도를 벗어나 이곳저곳으로 나의 사고가 자유롭게 주행하기 위해서는 간단하다, 그 이야기가 끝나면 된다. 모든 이야기의 끝을 만난 뒤 다시 한번 보게 되면 혹시나 꿈 밖에서 꿈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또 두 번이나 볼 만큼의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 흔치 않다. 예를 들자면 영화로는 <인터스텔라>라든가 <에일리언>, <존 말코비치되기>, <어바웃 타임> 같은 영화들이 지금 생각나는 '여러 번 보아도 좋을' 작품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인데... 뭐 개인적인 취향이다. 또 다른 방법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는 것. 영상물이 대화의 소재로서만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텍스트로 된 가공의 이야기들은 지배적이지도, 권위적이지도 않다. 주도권은 읽는 쪽으로 이미 넘어와있다. 그것은 '이야기'라는 실체를 띄고 있으면서 읽는 이에게 이야기를 넘어선 이야기를 걸어온다. 독자는 답을 하거나 답을 망설이거나, 전혀 다른 생각에 빠져들기도 하며 철로를 벗어나 자율주행의 질주에 돌입하기도 한다. 요는 말을 걸어오는가 침묵시키는가의 문제다. 시간을 생산하느냐 소비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드라마+영화 대 소설은 '가공의 이야기'라는 표면의 무늬는 같지만 선거를 앞둔 좌파와 우파처럼 확연히 갈라진다.


남아도는 시간을 땔감처럼 활활 태워버릴 소재가 필요하다면 가공의 영상물을 집어 들면 된다. 그것은 코믹하거나 엄청나게 황당하거나 로맨틱할수록 효과적이다. 당신의 시간은 잘 말린 장작으로 피우는 모닥불처럼 타닥타닥 기분 좋게 타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하루하루가 매일 조금씩 짧아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누군가는 시간을 그런 식으로 펑펑 써버리기에는 아깝다. 같은 시간이라면 소비보다는 생산 쪽의 문을 열고 싶다.




순간순간의 시간을 조금씩 확장하는 방법이라면 있다. 그 밀도를 아주 촘촘하게 채우는 것이다. 더 깊이 더 많이 더 넓게 느끼고 생각하고, 감동하는 것. 무슨 캐치프레이즈처럼 구태의연한 감이 없진 않지만, 그게 진실이니까. 영상물보다는 텍스트로 이루어진 것들이 시간의 확장에 더 기여한다고 믿고 있다. 오늘도 그렇게 시간 사냥을 위해 책을 펼치고, 다른 이들의 글을 읽는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을 읽어간다. 내게 돌직구할 질문들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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