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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Jan 09. 2021

시간과 노화의 리얼하고 까칠한 변주곡

사유의 정원에서

사람들과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만날 일이 거의 없는 주부 생활자인 필자도 화상대화 앱으로 가끔 사람들과 만날 때가 있다. 보통의 경우 오프라인 상에서 누군가를 만나 대화할 때 우리는 상대방들의 얼굴과 표정을 볼뿐 나 자신이 발화하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 그 장면을 누군가 촬영했을 때나 시간이 약간 지난 이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이 시대 없으면 아니 될 일생일대의 필수품 줌이나 구글 미트 같은 애플리케이션으로 여러 사람과 대화할 때 나는 어째선지 스스로가 말하고 있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표정, 입술의 모양, 눈의 깜빡임, 웃을 때 나타나는 주름, 옆모습과 앞모습 등등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자신의 모습을 자신이 말하며 관찰하고 생생하게 체험한다. 내가 사람들과 말할 때 이런 표정을 짓는구나, 입을 자주 오므리는구나, 코를 꽤 만지는구나, 으윽 목에 주름이 생겼구나, 말하다가 어색하면 이런 웃음을 웃는구나 등등. 그야말로 인류 역사에 거울이 등장하고, 카메라가 등장한 사건에 비할 법한 '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아마 나뿐 아니라 이런 리얼한 체험은 매스미디어에 얼굴이 등장하는 직업이 아닌 대개의 사람들에게 거의 처음 있는 생소한 경험이 아닐까. 그리고 동시에 생각한다. 한 살이라도 어려서 더 예쁠 때 이런 어플이 상용화되었더라면......, 이라고;;;







밖에도 거의 나가지 않고 나가더라도 마스크와 모자 등으로 꽁꽁 싸매고 사람을 피해 다님에도 불구하고 그것과는 별개로 시간은 깐깐한 학생주임처럼 가차 없이 나타나 내 몸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한 달 치, 반년 치, 일 년 치... 의 물리적 시간만큼 정확하게, 한 달 동안 집을 비웠다 돌아오면 한 달 치의 먼지가 집안 구석구석 내려앉아 있는 것처럼. 아무리 집콕 생활로 세상 공기를 피해 꽁꽁 숨어 있어도 시간은 나를 귀신같이 찾아내어 그만큼의 노화를 당당히 요구하고 이자까지 제대로 챙겨 앗아간다. 이것이 살아있는 자의 '납세'의 의무인 건가. 그렇게 우리에게 시간은 곧 노화이며 유한한 것이고 매일 줄어드는 소유할 수 없는 값진 무엇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노화를 그대로 방치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그 세계에서 '야만인'이라 불리는 특별한 존재들 뿐이다. 자연적인 출산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유전자의 적절한 조작으로 인공 부화기에서 탄생한 멋찐 신세계의 표준 인류들은 노화를 질병으로 간주하여 노화가 되기 이전에 그 원인을 없앤다. 그러니 그들에게 시간이란 필연적인 노화가 동반되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 아니다. 우울하면 '소마'라는 마약으로 우울한 감정을 떨쳐버리고 오직 쾌락과 젊음만을 누리며 (누린다고 믿으며) 살아가는 멋진 신세계의 그들에게 시간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가장 빛나고 아름답다는 20대를 평생 사는 것에 비유한다고 하면 그들은 청춘의 빛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까?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어느 쪽이 나을까 생각해보니 생각하고 말 것도 없다. 그럴 수 있다면 어느 누가 시간과 노화를 동시에 체험하려 들겠는가.




시간은 지구의 중심부에서 멀어질수록 천천히 흐른다고 한다. 그 사실이 밝혀졌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이론을 오해하여 산 위로, 더 높은 곳으로 집을 옮겼고 그 높이가 높으면 높을수록 지위와 부가 높다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정말일까? 물론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고층 아파트의 꼭대기층이 더 비싸게 팔리는 이유가 단지 전망이 좋고 다른 사람들과 섞이지 않는다는 이점을 떠나 혹시 '그 이론'이 암암리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었단 말인가? 하긴 이론이 일반인에게 알려지기 훨씬 전에도 부와 권력이 있던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선호했다. 온 인류의 언어가 하나였을 때조차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으며 위로, 위로 하늘까지 닿고자 올라가려 했던 것이다. 물론 그 이론이 알려지기 훠얼씬 전에도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없는 사람들보다 장수했다. 천차만별 각양각색 다양한 이유로.







세기의 명작 <인터스텔라>에서, 밀러 행성에 3시간 정도 체류했던 쿠퍼와 아멜리아가 우주선으로 돌아오자 우주선에 남아 있었던 동료 로밀리는 21년의 시간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저장해버린 나이가 되어 있었다. 밀러 행성의 1시간은 우주선이 머물던 장소의 7년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는 두 장소의 중력 차이 때문이었고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다. 이론의 세세한 설명은 건너뛰고 결론만 보자면, '중력이 강할수록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지구 상에서 중력이 가장 강한 곳은 극지방, 가장 약한 곳은 적도 지방이라고 한다. 그러니 시간이 조금이나마 천천히 흐르는 장소를 지구 상에서 찾으려 한다면 극지방의 산꼭대기로 올라갈 일이다. 무지 춥겠지만. 게다가 중력은 질량이 무거울수록 강하게 작용한다니 몸무게를 많이 불려서 극지방 꼭대기에 올라가 살면 원래 수명보다 오래 살지도... 북극은 다 녹아버릴지 모르니 이왕이면 남극으로 가서 펭귄들이랑 같이 사이좋게.



어쨌거나 질량에 따라 중력이 작용하는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어서인지 모르겠으나 제각각의 신체적 질량과 정신적 질량, 경험의 무게, 행복과 불행의 질량이 다 다른 사람들의 시간도 역시 저마다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다. 2021년을 막 넘어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우주라는 혹은 지구라는 같은 공간과 시간에서 사는 존재들이라고 하지만 그 시간은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동일한 시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당신이 눈에 보이고 내가 눈에 보여지기에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소한 오해들 속에 오늘도 역사는 무심히 흘러가고 있는 것일지도. 시간과 노화의 리얼한 변주곡을 BGM으로 설정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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