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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Jan 16. 2021

추억과 부끄러움 사이

소소하게

중학교 때 한국사 선생님은 학년 말을 앞둔 우리들이 반 추억 노트를 만드는 것을 보고 기분 나쁜 저주라도 하듯 싱글싱글 웃으며 충격적인 한 마디를 던졌다.



“너네들 지금은 그게 추억이라는 둥 좋~다고 만들지만 나중에는 지난 것들은 다 부끄러워질 거다. 아마 어느 순간 다 휴지통에 넣어버리게 된다고. 두고 봐라."  



어림짐작해보면 선생님의 나이는 약 오십 대 후반 정도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백 씨 성을 가진 남자 선생님이었다. 한국사를 싫어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던 그 선생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애들한테 무슨 악담이야... 정도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후로 몇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말이 또렷하게 생각난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다 그런 의미가 있다고 이적은 노래했지만 지나간 것은 부끄러움의 발자국임을, 백 선생님의 경험치가 축적된 그 명언이 진짜였다는 사실을 나는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알게 되는데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마음이 그렇네, 어린 소녀가 지루함=나쁨이라고 취급해버린 그 선생님은 결코 나쁜 분은 아니었던 것이다. 진실을 너무 빨리 가르쳐주셨을 뿐.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한다고 하지. 누군가는 그것을 마음의 그릇 크기 같은 것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확실히 우리가 자라고 성숙하고 노화하는 과정에서 그 보이지 않는 '본질'의 크기 역시 당연하게도 변화, 발전, 성숙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한국사 선생님이 말한 것이 진리고, 진리를 좇아 사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면 대체 개인의 사사로운 기록이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지나간 것이 부끄러움의 자취라면 나는 당장 이 브런치부터 백지화해야 하는 것인데. 우리는 남의 부끄러움에는 무심하지만 자신의 부끄러움 앞에선 어쩔 줄 몰라하곤 한다. 때로 한밤중에 문득 그 기억들이 찾아오면, 어둠 속에서 곰인형이라도 꼭 껴안아야 하는 것이다.



​과거의 내 사진을 다시 보는 것과 과거의 내 글들을 다시 보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과거의 얼굴은 언제나 지금보다 아름답지만, 치기 어린 과거의 글들은 하나 같이 부끄럽다. 추억과 부끄러움의 두 축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것은 '시간'. 그 어디쯤 도달해야 과거의 사진과 과거의 글 모두가 내 소중한 생의 일부임을 깨닫고 전부를 포용하고 긍정할 수 있을까. 먼저 스스로를 긍정해야 대상을 긍정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또 이렇게 머뭇머뭇, 발행 버튼을 누를까 한참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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