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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Jan 25. 2021

달리기를 말할 때

소소하게

나는 달리기를 정말 못한다. 정말정말정말 못한다. 4명이 뛰면 4등을 하고 8명이 뛰면 8등을 한다. 아마 20명과 함께 뛰면 20등을 했을 거라 장담한다. 국민학생 시절, 운동회를 할 때마다 달리기는 공포 그 자체였다. 일단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에 먼저 기겁을 했다. 땅! 소리가 나면 애들은 뛰기 시작하는데 나는 뒤로 잠시 멈칫한다. 놀라서!! 뛰기 시작하면 이미 애들은 저 앞을 달리고 있다. 단 한 번도 순위에 든 적이 없다. 1,2,3등까지 팔에 찍어주는 도장을 받아본 적이 없고 1,2,3등까지 주는 상품을 6년 내내 받아본 적이 없다. 어린 마음에 달리기에 등수를 매기는 것이 비인간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 명씩 순서를 달리해 그냥 뛰면 되지, 왜 꼭 경쟁을 시켜서 순위를 매겨야 되는 거냐고 (거칠게) 항의했다. 마음속으로만.



세월이 흘러 운동회를 지켜보는 학부형이 되었다. 아이들이 달리기를 하는데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을 제끼고 1등으로 나서는 광경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이, 이런 감격의 순간이란. 이게이게 이런 거였단 말인가? 역시 달리기는 경쟁이지, 뛰는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내 딸이 달리기 일등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신기방기하고 오묘했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내가 맨 끝에서 버벅거리며 달리고 있는 모습을 본 우리 엄마아빠 마음이 어땠을까, 하고.



북유럽의 교육강국으로 알려진 핀란드에서는 아이들의 학업에 절대 순위를 매기지 않는다고 한다. 오직 100미터 달리기를 할 때만 순위를 매긴다고 한다. 그렇다. 아무리 핀란드라도 달리기 순위는 매기는 것이다. 달리기에서 꼴찌 하는 아이의 마음을 그 누가 이해할 수 있는가. 그건 꼴찌를 해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버스 타고 학교에 다니던 중고딩시절의 정류장에서, 정류장을 몇 미터 벗어나 세우는 버스를 향해 모두가 뛸 때 나는 절대 뛰지 않았다. (지금은 버스 정류장에서 줄을 서는지 모르겠네) 천천히 걸어서 사람들이 다 타고난 다음에 맨 끝에 낑겨서 만원 버스를 타곤 했다. 뛰는 게 싫어서였다. (이쯤 되면 트라우마인가) 대학교 때 드넓은 캠퍼스를 많이도 뛰어다녔다. 속도가 나지 않는 속도로 1교시가 이미 시작된 강의실을 향해 뛰거나, 이미 시작된 기말고사 시험을 향해 뛰었다. 뛰기나 달리기에는 여전히 흥미가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땀이 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달려도 속력이 붙질 않았으므로.






꼭 달려야 하는 상황에서 애써 달리지 않으며 때로 조선 시대 양반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불이 나도 달리지 않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체통을 지키기 위해 달리지 않았다잖아... 그러한 양반의 습성을 좋아해서 달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함께 달리는 사람들이 있을 때 달리지 않았을 뿐. 거북이더러 달리기 경주를 하자고 꼬드긴 토끼가 정말 별로였다. 뛰고 싶으면 혼자 뛸 것이지 거북이 마음이 오죽했겠나 말이다.


'달리기'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딱 두 사람이다. 하나는 허구의 인물이고 또 하나는 실제 인물인데, '포레스트 검프'와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 둘. 전혀 닮지 않은 두 인물이지만 둘 다 '살기 위해' 달린다는 점은 닮아있다. 그리고 또 뭐랄까, 둘 다 정직한 캐릭터라는 점도 어쩐지 닮았다는 생각이 드네.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느낌이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속이지 못할 것 같다는 이미지가 있다, 달리기라는 것에는. 그러고 보면 '달리기'는 싫어해도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싫어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네.  



내가 아무런 저항 없이 달리기 시작했을 때는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했던 그때였다. '이 일을 선택하기 정말 잘했다'고 느꼈던 그 프로그램을 할 때 나는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 언덕 위에 있었던 그 ‘일터’를 뛰어다녔다. 처음에는 같이 일하던 동료에 적응하는데 애를 먹어 때려치울까 고민하다 이후에는 잘 적응했는데, 뭣 보다 일이 너무 재미있었던 것이다. 재미있다고 느끼지 못했다면 진작 포기했을 테지만 그 재미에 마지막까지 할 동력을 얻었던 듯하다.



달려가서 하고 싶을 그런 일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그 느낌을 꼭 다시 느끼고 싶은데 말이지. 가만히 앉아 달리기를 말할 때 ‘열정’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살기 위해 달리기보다 재미있어 달려가고 1,2위를 가리기 위한 달리기가 아닌 과정을 즐기는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세상이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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