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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Mar 05. 2021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죽음은 생의 한가운데에

읽기의 자율주행

법의학자 유성호 님이 쓴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는 당연하게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죽음에 관한 책은 터부, 슬픔, 고통처럼 판에 박힌 방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책은 그 관점에서 조금 벗어난 사회학적 시각으로 기술되고 있었다.



책 표지의 소개 문구에 '법의학자의 예리한 시선에 인문학적 통찰이 더해진 죽음 지침서'라고 되어 있는데 진정 제대로의 소개글이었다. 제목은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자극적으로 지은 것 같다. 글을 읽어 나가며 다른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저자의 ‘존중감’이 느껴졌다. 사실 그러한 마음가짐이 없다면 법의학을 그저 단순한 호기심으로 접근해서 평생 업으로 삼을 수는 없지 않을까 한다. 의사의 존재 목적이 생명을 향하는 것이라 한다면 법의학자는 죽음의 중심에 있어야만 한다. 두 분야 다 엄중한 업이기는 하지만 무게로 치면 법의학자의 무게가 1.5배 정도는 더 무겁게 느껴진다.



책에서는 크게 세 가지 장으로 나뉘어 법의학자란 누구인지, 죽음이란 본질적, 생물학적으로 무엇인지, 우리는 왜 죽음을 공부해야 하는지를 서술하고 있었다. 인상적이었던 내용 중 하나는 이런 것이었다.



"환자가 사망하는 과정에서 가장 흔하게 겪는 일반적인 징후는 졸음이다. 굉장한 졸음 때문에 환자는 혼미한 그로기 상태에 빠져 깨워도 계속 존다. (중략) 이제는 자연스럽게 죽음으로 가는 단계라고 보는 졸음의 단계, 혼수상태를 무한정 연장할 수 있다."

(본문 중에서)




사망 과정에서 가장 흔하게 겪는 징후가 졸음이라는 사실이 새로웠다. (물론 죽음의 양태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겠지만) 졸음이라니, 사람이 매일 겪는 행위가 아닌가. 여하튼 과거에는 그 혼미한 그로기 상태에서 죽음으로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현재는 '연명치료'에 의해 삶과 죽음 중 어느 영역인지 불분명한 중간 지대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이 스스로 그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정하고, 가족들에게 미리 인지시키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에서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스무 살에 읽은 그 문장은 긴 시간 내 안에서 깊이 물결치고 있었다. 과연 삶이 죽음을 끌어안고 있는 형태일까, 죽음이 삶을 끌어안고 있는 형태일까. 어느 쪽이 더 큰 개념인 건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거나 스스로 죽음의 한가운데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오게 되면 삶의 대극이 아닌 한가운데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 느끼게 된다. 도넛의 가운데 구멍처럼, 그렇게.






법의학자인 저자는 죽음과 삶을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바라보며 기술하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였다.



"품위 있는 죽음이란 죽음이 두렵지 않은 상태의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생명체의 필연적 과정이다. (중략) 모든 생명체는 소멸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본다. 그런 후 대척점에 있는 삶을 치열하게 끌어안은 인생을 산다면, 그러한 사람만이 삶의 마지막 과정에서 자신이 존엄하게 어떤 방식으로 사망할지 고민하고 준비할 수 있으며, 자신만의 내러티브로 인생이라는 마지막 장을 서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의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늘 죽음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유한한 삶에 감사하며, 자신과 주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지막 죽음의 과정에서 선택할 여유를 갖게 된다. 이러한 죽음이 곧 품위 있는 죽음이 아닐까." (본문 중에서)





쉽지는 않은 일일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자신의 일이 된다면 아무리 단단히 준비를 한다 해도 준비한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겠지.





최근 미얀마의 계속되는 비참한 민주 투쟁 소식을 접하며 어느 스무 살 학생이 '죽으면 장기를 기증하겠다'라고 쓴 팻말을 목에 걸고 민주화 시위를 하는 사진을 보았다. 그녀는 결국 숨졌다. 알지 못하는 이의 죽음이지만 참으로 마음 아팠다. 자신의 목숨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그녀는 알았던 것이다. 그녀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아니 절대 헛되지 않으리라 믿는다.



모든 생명체는 소멸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스스로의 소멸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어느 순간에는 분명 죽음에 관해, 특별히 자기 자신의 소멸에 대해 ‘입장 정리’를 해 두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그것을 마음의 상자 안에 깊숙이 넣어두고 그 사실을 기억한 채 남은 주어진 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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