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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Mar 13. 2021

나는 로봇이 아닙니다

사유의 정원에서

때때로 특정 사이트에 접속할 때 아이디를 입력하고 패스워드를 넣은 다음에도 '네가 로봇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라'는 명령이 제시될 때가 있다. 여러 개의 사진들 중에서 가령 횡단보도인 것을 모두 체크하라든가, 트럭을 모두 고르라든가 하는 식이다. 얼마 전에는 '미터기'를 모두 체크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딱 하나의 사진 말고는 미터기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미터기로 보이는 것만 체크했더니 재차 '로봇이 아님을 증명하시오'가 경고처럼 떴다. 나는 조금 당황하여 정확히 미터기로 보이는 것 하나와 미터기인지 아닌지 알 듯 말 듯한 사진도 체크하여 버튼을 눌렀더니 봉인이 해제되었다. 어쩌면 '알 듯 말 듯'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즉, 로봇에게 있어 '알 듯 말 듯'의 개념은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그 중간 지점으로 사용자를 유인하여 '휴먼’ 임을 증명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 하는.



만약 A.I의 활용이 지금보다 훨씬 더 보편화된 시대가 되면 로봇이 아님에 대한 ‘증명'은 보다 더 고차원적인 과정을 필요로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현재의 '로봇 아님'에 대한 증명 과정은 더 세분화되고, 트럭이나 횡단보도 따위의 단순하고 즉물적인 것으로는 가려지지 못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표정과 헤어 스타일을 달리 한 사람들 가운데 '같은 사람을 찾으라'는 질문이라든가, 혹은 더 어렵게는 '기분이 가장 좋아 보이는 얼굴을 찾으시오' 같은 방식으로 바뀔지 모른다. 조금 많이 앞질러가면 곧 '로봇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을 훌쩍 뛰어넘어 '인간이 아님을 증명'하라는 제시문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또는 로봇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과 인간이 아님을 증명하는 두 가지 양태로 각각 분리된 로그인 방식이 생겨나게 될 수도 있다. (너무 나갔나. 하지만 조금 더 나아가기로)


<로봇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과 인간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 VS <로봇임을 증명하는 것과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


과연 어느 쪽이 더 어려울까? 보통은 무엇이 무엇임을 증명하는 것보다 무엇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예컨대 죄를 지었음을 증명하는 것보다 죄를 짓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과도 비슷하다. 유죄의 증거를 찾아내는 것보다는 무죄의 증거를 찾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니까. 그러니 로봇이 아님을,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는 쪽이 더 번거롭고 복잡하지 않을까.





로봇이 아님을 증명하는 가장 즉각적인 방식이라면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처럼 홍채를 인식하는 방식 등이 있을 수 있겠고, <가타카>에서처럼 체액을 통해 신분을 혹은 인간임을 증명하는 방식도 있다. 하지만 이후 사람의 것과 거의 같은 홍채를 가진 로봇이 등장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으며, 실제로 바디 안에 체액이 내장되어 있는 로봇도 생겨날 수 있다. 많은 S.F 영화나 애니메이션 혹은 게임에서 안드로이드(인간의 외형을 닮은 로봇)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눈가에 작은 파란 점이 표시되어 있기도 하고, 어떤 영화에서는 실은 안드로이드임을 완벽하게 숨기고 인간처럼 생활하며 살아가다가 결말에 이르러 반전되는 에피소드도 자주 등장한다.


현재 세상에 나와 있는 안드로이드 로봇 중에서 핸슨 로보틱스사의 '소피아'는 가장 발전된 형태의 안드로이드라고 하는데, 소피아는 창의력과 공감능력, 연민의 능력도 갖추고 있다고 한다. 한 인터뷰에서 이 로봇은, "당신이 로봇인 걸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에 "당신이 인간인 건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느냐"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인간은 머지않은 미래에 로봇 앞에서 자신이 인간임을, 즉 로봇이 아님을 증명해야 할 날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혹은 더 디스토피아적으로 상상하면 자신이 로봇임을, 인간이 아님을 억지로 증명해야 할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보다 더 무서운 가정은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오히려 로봇에 더 가까운 인간이 많아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쯤 되면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기계인간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무시무시한 지경까지는 떠올리지 않기로 하자.


소피아



미래학자 니콜라스 카(Nicholas G. Carr)는 그의 저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인터넷이 인간의 뇌구조를 바꾸고 있으며 디지털 문화에서 우리는 컴퓨터가 인간처럼 될까 걱정하기보다 우리가 컴퓨터(기계)처럼 될지를 더 걱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분명 디지털은 인간의 뇌를 바꾸어가고 있다. 그것이 진보인지 퇴보인지 선뜻 판단할 수 없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면 된다. 진보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드는 반면, 퇴보하는 데는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 뇌는 점점 더 에너지를 쓰지 않고 디지털의 편리함에 안락하게 몸을 맡기고 있지 않은가. 디지털이 인간의 문명을 확실히 진보시켜 간다 하더라도 우리 '뇌'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 다른 것이다. 니콜라스 카의 지적이 그저 기우만은 아닌 것 같다.




그나저나 어쩌다 우리는 매일 '로봇이 아님을 증명'하며 살게 되었을까. 대단한 인류의 비밀모임에 특별 게스트로 초대된 것도 아닌, 겨우 사이트 하나에 로그인하려고 했을 뿐인데. 어쨌든 오늘도 '로봇이 아님'을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다 보면 머지않은 미래, 어쩌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거대하고 실존적인 질문 앞에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 인간으로 사시겠습니까, 로봇으로 사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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